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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8 23:25
유시민의 '정계은퇴이유서', 그리고 김갑수著 '역사여, 다카키마사오여!'
1.
유시민은 매력적이고 수단이 좋은 정치인이었다. 흰색 면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의원 선서는 지금 돌아봐도 유쾌하기 그지 없다.
한나라당 정치인들은 폭탄 테러라도 당한 듯 길길이 뛰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들 상당수는 '딱 떨어지는' 고급 정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반민주 경력과 상스러움도 달고 살지 않는가. 2003년 재보선으로부터 만 10년, '의원님'에서 '장관님', '대표님'까지, 짧지만 더없이
화려했던 정치여정에 비하면 그의 은퇴는 조금 쓸쓸해 보였다.
오래 준비된 사직서처럼, 그는 책 한 권('어떻게 살 것인가', 2013, 아포리아)을 던지고 정계를 떠났다. 정치인이 내는 책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다. 이건 케케묵은 독재 인사든 생생한 초선 의원이든, 아니면 직접 썼든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썼든 마찬가지다. 유시민은 확실히 좀
달랐다. 서울대 경제학과 시절과 학생 운동, 독일 유학과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오기까지의 외유, 또 정계입문 이후 6개의 정당과 3번의 과감한
정치실험까지, 자기 얘기와 자기 생각이 녹아있다. 유시민의 인생론이자 윤리론이라 할 만하다. 그는 의외로 규범적인 인간형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문재인을 자기의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축하 인사와 덕담을 건네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만약 우리가 박근혜의 승리에 환호하는 유권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재인이 승리했을 경우 그들에게서 축하와 덕담을 받을 도덕적 정치적 자격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유시민 '품격
있게 나이를 먹는 비결' 중)"
2.
김갑수는 작가다. 그는 '글쟁이가 좋아하는 글쟁이'다. 김갑수의 책 ('역사여, 다카키마사오여!',
2013, 씨앤씨북스)는 제목과 표지부터 '움찔'했다. 그냥 너무 촌스러웠다. 포장 같은 건 필요없단 투다. 그는
대형서점들이 작가들을 불공정하게 대한다는 이유로, 아예 출판시장에 책을 내놓지도 않았다. "무난히 마지막 책까지 세상에 내놓는 것"만이 작가
김갑수의 소망이다. 내용도 까칠하다. 그런데 문장은 또 더없이 미려해서, 이런 미문에 이렇게 까칠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가장 칭송받아선 안 될 인물들을 골라, '김옥균'의 유폐지에서 '큰 영애'(박근혜)의 식탁까지 날카롭게 파고드는 1장(총 4장으로
구성)만 봐도, 왜 그가 마니아들을 몰고 다니는 지 눈치챌 수 있다.
유시민과 김갑수, 둘을 같이 소개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몇
일 간격으로 나온 두 저자의 책은 비슷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비슷한 재료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김갑수의 책은, 유시민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유시민의 책이 주는 일종의 '환각(幻覺)' 작용에 대해, 김갑수의 책이 '환멸(幻滅)'을 준다고나
할까. 이것 참, 기대 이상으로 강렬하다.
김갑수(왼쪽), 유시민ⓒ민중의소리
김갑수는 문단에서만 알려진 작가이므로
짧은 소개가 필요하다. 유시민 보다 두 살 많은 김갑수는, 박정희의 긴급조치가 있던 1974년 신일고등학교 학생으로 데모를 주동한 적이 있다.
유인물만 뿌려도 15년형을 받던 때이니, 유시민이 데모를 했던 신군부 때와 분위기도 엇비슷하다. 직업 작가로서의 김갑수는 한국 근·현대사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역사물에 몰두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김갑수의 증조부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동학군
접장이었다. 또 그의 조부는 옥사에 갇힌 아버지 면회를 갔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반신불수가 되어 나왔고, 그런 연유로 서너살 때부터 모를 맸다는
김갑수의 아버지는 농사일에 함석 기술까지 배워 기어이 자식 일곱을 '선생님'으로, 또 '작가'로 키워냈다.
이런 내력 때문일까.
유시민과 달리, 박근혜 정권을 보는 김갑수의 시선은 통시적이고 비극적이다.
"어떤 때는 조국을 증오하기도 했다는 그들, 바이칼의
빙설을 물들이며 수백 개 꽃잎 모양으로 도살된 그들, 계곡의 하얀 빙설에 동지들의 피가 얼룩지고, 그 피 향기를 시베리아의 바람이 휩쓸어 갈 때
조국을 증오해 보았다는 그들,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들...
그들의 유골이 아직 눈을 감지도 못한 채 해골을 조국 쪽으로 향해
굴리고 있을 터, 세상에 이런 역사가 또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아버지 할아버지들을 두고서 일본군인의 딸을 또 다시 대통령으로 만드는
나라가 정상일까?...(김갑수 '세상에 이런 역사가 있단 말인가' 중)"
3.
'환멸'이라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글쟁이 유시민은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감추는 버릇이 분명 있다. 섣불리 재단할 필요는 없다. 거꾸로
그가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할 이유도 없다. 과거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우리는 정치인들에게 속고 또 속지 않는가.
그렇지만 유시민의 '감추는' 버릇은, 그가 선비형 인물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경우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어그러지기
십상이다. 일례로, 이 책엔 지난해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유시민의 설명이 나온다.
"진보정당이든 보수정당이든 치열한 경선을
하면서 투개표 관리를 이렇게 하면 부정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기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본능이기 때문이다. '총체적 부정부실
선거'의 실태는 당의 자체 진상 조사에서 다 드러났다... 부정을 저지를 수 있는 조건을 다 만들어놓은 게 중앙당 지도부였는데, 그 지도부가
당원을 조사하고 징계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을 포함해서 경쟁에 참가한 모든 비례대표 후보가 사퇴하고 국민에게
사과한 다음 당 전체가 새 출발을 하자는 제안이 나온 것은 바로 그런 고민 때문이었다.(유시민 '신념의 도구가 되는 것')"
다음은 김갑수의 설명이다.
"지난 4.11 총선 직전 그(유시민)는 자기와 밀착 관계였던 오옥만이 비례대표 제주도 온라인
투표에서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위기감을 느꼈다. 부정 사실을 덮은 채 조마조마 총선을 치른 그는 선거 부정을 오히려 이정희의
당권파에게 뒤집어씌우며 이정희의 백의종군을 요구했다. 이것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담한 만행이었다(김갑수, '유시민, 벌써
떠났어야 한다')"
이 진보당 사건은, 종북 소동과 황색 저널리즘의 잡음 때문에 너무도 복잡하고 흉하게 전개되어 실상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김갑수 작가가 '과학이론은 아름다울수록 정당하다'는 말을 인용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겉모습이 복잡해 보이는 사건일수록 진실은
단순할 때가 많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2년 통합진보당 온라인 선거부정 논란이 지나갔고, 뒤늦게 한 양심적인 대학교수(컴퓨터법의학, 관련 인터뷰 바로가기)가 '유일한 선거부정은 참여당계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 또한 유시민은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가 저지른 부정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진보당 사태 당시,
참여당계가 자신들의 부정을 꼭꼭 숨긴 채 '공동책임'(사실은 당권파가 모든 책임과 오명을 뒤집어쓰는 그림이었지만)을 요구했다면, 이는 정말
비겁하지 않은가?
4.
노무현을 사랑하는, 그러나 유시민과 진중권을 미워하는, 김갑수는 스스로가 밝히듯 고 노무현
대통령의 '행동하는'(그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 당시, 그 부당성을 알리는 정치평론 작업에 몰두했다) 지지자였다. 이런 사실은, 두
저자의 시선 차이가 정치색 때문이라는 편견을 피하게 해준다.
"그들(유시민, 진중권 등 친노인사들)은 모두 노무현의 사과와 해명은
무시한 반면 여론과 언론 보도 쪽으로 자기 처신을 선택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반 후 노무현 서거를 기점으로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말 그대로
운니지차, 즉 진흙에서 구름으로 달라진다(김갑수, '노무현의 죽음, 친노와 <오마이뉴스>의 기회주의')"
유시민이
'친노냐, 아니냐'라는 논란은 매우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 누구라도 유시민을 '친노'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갑수가 날카롭게 지목한 '2009년 4월 8일'이라는 시점에선, 이 무명작가의 눈이 가장 정확한 것 같다.
"저는 이번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정책이나 정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님 내외분의 개인적인 일이어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지도 못하며,
따라서 아직은 어떤 규범적 판단을 내릴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 모든 진실이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유시민)
"이 정도면 총체적 파국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리석을 정도로 무구했던 그 순수한 신뢰를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배신해도 되는 것인지 안타깝다. 참여정부가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이렇게 한심한 수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미디어로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진중권)
이미 정치인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간 '노무현'에게, '2009년 4월 8일'은
중대기로였다. 노 전 대통령의 공개 사과가 있고 하루 뒤인 그 날은 여론이 '그 사과의 진정성과 해명의 객관성을 수용할 것인가'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권력의 부당한 압박에 저항할 자기 명분을 지킬 수 있는가'의 갈림길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한 권의 책엔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두 차례 정도 언급되는데, 그것은 저자 자신의 정치적 부침에 대한 얘기 중에 나오는 것일 뿐이다. 단역이라 하기에도
너무나 짧은 부지불식간이다. 이 책은 정치인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유시민'의 중요한 의식일 것이다. 유시민이 자신의 정치여정과 삶을
돌아보고 내면의 소리를 정리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노무현'의 자리가 없었다. 정계은퇴의 시점에서도, 그는 '친노'는 아니었던 것
같다.
5.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와 김갑수 '역사여, 다카키마사오여!'ⓒ민중의소리
유시민은 확실히 문제적인 정치인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극과 극이다. 유시민의 절친인 한홍구는 언젠가 민주당 '386'과 비교해 그의 '철 들지 않음'을 자랑해주기도 했고, 칼럼니스트
김규항은 유시민이 "권력의 정점에 있을때 뱉은 오만 표독한 말"과 정치적 수세에 있을 때의 언행을 비교하며 "사람이 처지에 따라 조금씩은 태도가
다른 법이지만 유시민처럼 차이가 큰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20년 넘게 정치인으로 살아온 유시민은, 스스로 고백하듯
정치엔 실패했지만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낸 바 있다. 유시민이 책에서 보여주는 언어 또한 '오만' '표독'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무척이나
담백하고 부드럽다. 김갑수는 유시민이 정계입문하기 전인 1984년에 등단한 작가이지만, 일반 독자에겐 무명의 신인이나 다름없다. 그는 집필이
힘에 겨울 때 정치평론을 써왔다. 그런데 대다수 정치평론가들과 달리 그에겐 유력 정치인에 대한 '아첨'이 없다. 오히려 '저러다 명예훼손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로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실제로는 부정적 인물인데 오히려 긍정적 인물로 미화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 부정적 인물이 미화되면 긍정적 인물이 소외된다"는 게 김갑수가 밝히는 이유다.
직업 정치인이지만 스스로를 '글
쓰는 사람'으로 자부하는 유시민과, 직업 작가이지만 정치인에 대한 독설을 퍼부어대는 김갑수. 글쓰기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재밌다.
"...글을 써서 내 생각과 내가 가진 정보를 남들과 나누는 행위 그 자체가 즐겁고 기쁘다.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놀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이든 놀이든, 이것이 제대로 의미를 가지려면 내가 쓰는 글이 쓸모가 있어야 한다....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나는 많이 읽히는 동시에 훌륭한 책을 쓰고 싶다... (유시민, '쓸모
있는 사람 되기')"
"...나는 나 자신이 좀처럼 읽지 않을 뿐 아니라 남에게 읽지 말라고 권하는 책이 세 종류 있습니다.
위인전과 자기계발서와 베스트셀러입니다. 이 책들의 가치와 진정성은 따로 논의해야겠지만, 나는 일단 사람이 타인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기
정체성을 잃고 부자연스러워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유용한
자들은 모두 야비한 놈이다'라는 보들레르의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글을 주로 쓰는 것입니다(김갑수, '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