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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로 얼룩진 이명박 정권을 심판해야 하는 이유

댓글 6 추천 12 리트윗 1 조회 808 2012.03.23 08:55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명박 정권을 심판해야 하는 이유



지금으로부터 8년 전
2004년 3월 12일, 여의도 서쪽 민의의 전당에서 망나니 도부수(刀斧手)가 거친 입에 한 모금 마신 술을 번득이는 칼에 쫙 뿌렸다. 도부수는 좌우로 비틀거리며 춤을 추더니 번득이는 칼을 팔자로 그리면서 목을 내리쳤다. 목이 떨어져나간 곳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른다. 몸뚱어리는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는 따로 굴러가서 눈만 멀뚱하니 뜨고 있다. 국민은 망나니가 휘두른 칼에 이렇게 해서 무참하게 목이 베어지고 민주주의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민주주의 대학살로 16대 국회는 국민에 의해 사망선고 당하였다.


박정희 쿠데타와 전두환 쿠데타에 이어 역사에 얼룩지어진 한나라당의 의회 쿠데타였다. 이 날은, 국회의원 총선을 불과 33일 남긴 시점에서 한나라당 망나니들의 사주[使嗾]로 국회의장 박관용이 경호권을 발동하여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킨 날이었다. 이는 국민의 불안과 국정의 혼란을 야기하고 대외적으로 국가 위신을 추락시켜 국가적인 위기상황을 초래한 전무후무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제246회 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를 통과한 대통령 탄핵소추안은 홍사덕•유용태의원 외 157인이 발의하였으며 3월 9일 국회사무처 의사국에 접수된 탄핵소추안은 그날 본회의에 보고되었다. 사흘 뒤 3월 12일 재적의원 271인 중 193인의 찬성과 반대 2명으로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다. 망나니들의 야합으로 국회에서 통과된 노무현대통령 탄핵소추의결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과 지지자 모임에서 행한 발언과 연설이 거듭하여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질서를 문란케 하였고, 대통령 자신과 측근들, 그리고 참모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인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법적 정당성을 상실하였으며, 세계적인 경기호황 속에서도 국민경제와 국정을 파탄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림으로써 국민에게 IMF위기 때보다 더 극심한 고통과 불행을 안겨 주었기에 탄핵소추 한다고 밝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전 3월 10일, 교수노조, 녹색연합, 민교협, 민변,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은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대통령 탄핵발의 철회를 촉구하는 시민단체 긴급기자회견'을 열었다. 한나라당 망나니들은 재야 사회단체들의 민의에 찬 요구를 묵살하였고 3월 12일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 수천 명은 퇴근 후 여의도 국회 앞에 집결하여 밤늦게까지 촛불시위를 하였다.


3월 13일, 탄핵이 가결된 다음날은 광화문에서 탄핵무효 촛불집회 첫날을 가졌고 예상을 넘는 7만 여명의 시민들이 망나니의 칼에 휘둘려 떨어진 국민의 자유를 줍느라 촛불을 밝혔었다.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는 전국적으로 수백 개의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탄핵무효 부패정치 청산을 위한 범국민행동'이 결성되었으며, 탄핵무효 부패정치 청산을 위한 범국민행동이 주최한 '3.20 탄핵무효를 위한 100만인 대회'가 서울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60여 곳에서 열렸다. 서울시청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까지 촛불을 든 시민이 20여만 명으로 가득 찼으며 국정을 책임진 노무현 대통령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행진을 하는 분노에 찬 모습을 청와대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국민들은 위대하였다. 망나니들의 의회 쿠데타에 무너진 민의에 찬 자유를 되찾기 위해 4월 15일 투표로서 한나라당을 심판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탄핵심판론'을 내세운 열린우리당이 과반 수 의석을 넘어 152석을 차지했다. 헌법재판소(재판장:윤영철 소장)의 탄핵심판결정이 내려지기 전 국민의 심판이 먼저 내려졌던 것이다. 국민이 만들어준 여대야소의 정국을 열린우리당은 노무현대통령을 모시고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국민은 힘을 실어줬다. 헌법재판소에서는 5월 14일, 9명의 헌법재판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노무현대통령 탄핵안 심판에서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이 탄핵심판을 기각한다고 선고했다. 이로써 노무현대통령은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8년 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있었던 탄핵역사를 재조명해보았다.


이명박 전 시장은 2006년 11월, 노무현정권이 바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젊은 부부들에게 집을 한 채씩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짓말도 능수능란하게 하는 위인이다. 그가 국정을 농단한 지난 4년간의 비리는 탄핵소추를 받아도 뭐라 말할 국민이 없을 것 같다. 그만큼 이명박 정권은 총체적 비리공화국으로 얼룩져있다.


형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 ‘만사형통’의 절대 권력자 이상득과 친인척들의 비리를 열거하자면, ‘요즘 문제가 재차 불거지고 있는BBK주가조작사건’, ‘상암동 DMC 사건’, ‘위장전입’, ‘위장취업사건’, ‘위증교사’, ‘도곡동 땅 사건’, ‘다스 소유권’. ‘삼화저축 사건’, ‘내곡동 사저게이트’, ‘형님 게이트’, ‘김윤옥여사 사촌오빠 게이트’, ‘저축은행 게이트’, ‘이국철 SLS그룹회장 게이트’, ‘C&K카메룬 다이아몬드광산 개발의혹사건’과 ‘추부길 홍보기획비서관, 강경호 코레일 사장, 천신일 세중다모 회장, 장수만 방위사업청장, 배건기 청와대 감찰팀장, 최영 강원랜드 사장, 은진수 감사원 감사위원, 김해수 정무1비서관, 김두우 홍보비서관, 신재민 문화체육부 차관 등의 비리 이외에도 앞으로 불거질 사건들이 줄줄이 엮여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912조9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등록금을 대출받은 대학생 수와 금액은 80만 명에 2조 9000억 원으로 신용불량자가 많이 늘었으며, 실업난 역시 최고를 기록했다. 통계청과 경찰청 등에 따르면 베이비부머의 주력계층인 50~54세 남성의 2009년 기준 10만 명당 자살률은 62.4명으로 통계작성 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상위 1%에만 관심을 가진 MB정권은 이렇게 온갖 부정과 비리에 물가는 엄청 올라 서민경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비참해지고 국민과의 소통도 없이 입만 열면 거짓말로 국민을 우롱하였다. 민주통합당은 비리공화국 청문회조사를 한다고 하지만 노무현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나라살림과 부정부패로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이명박이야 말로 더욱 더 탄핵을 받아야하는 당사자란 점을 알아야겠다. 그리고 그 옆에서 고고하고 깨끗한 척 목에 힘주는 도도한 여성 박근혜야 말로 MB를 견제하지 못한 책임을 단단히 지고 국민에게 석고대죄를 올려야한다.


박근혜의 정치는 독재자아버지에게서 수직형 권력을 배운 정치인이다. 수직형 권력은 독재 권력이다. 지금도 그녀의 몸짓에서 독재 권력이 묻어난다. 그리고 이명박도 수직형 권력자다. 수평형 권력은 노무현대통령이 국민에게 수평으로 내려놓은 권력이다. 근래에 와서 역대 대통령의 인기도를 조사한 결과 왜 노무현대통령이 1위를 차지했을까?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에 대해서도 박근혜는 노무현정권 때라고 이야길 하는데 김영삼 정부 때부터 타당성 검사를 해왔었다. 해군 내부문건 보고서에도 군항지로서의 부적합 판정을 내렸던 사업이었다. 국민은 노무현대통령이 탄핵소추 당한 것을 보고 30일 뒤 국회의원 선거로 심판을 했다. 국민은 제17대 국회의원을 열린우리당에게 과반 수 의석을 넘어 152석을 만들어준 것이다. 이명박이 민주통합당에 지금과 같이 효도를 할 때 민주통합당은 160석은 차지해야 당연한 것 아닌가?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실망하여 민주통합당에 힘을 실어준 고마운 이유를 알아야겠다.


부산에서 민주통합당의 ‘문성길’ 라인이 낙동강에 전선을 형성하고 부산, 경남을 공략하는 작전을 세웠다. 낙동강 전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1997년 대통령선거 김대중 후보 때와 2002년 대통령선거 노무현 후보 때를 참고삼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7년 대선 때 IMF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 특히 경상도는 이회창에게 38%이상 표를 줬다. 사실 50%가까이 표를 줄 수도 있었는데 이인제가 중간에 400만 표를 가져가서 겨우 38%인 900만 표 득표에 만족해야했다. 김대중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당선은 김대중이 되었다.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후보가 48.9% 1천200만 표를 득표해서 당선되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46.6% 1천100만 표를 득표해서 떨어졌다. 영남의 유권자는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에게 46%나 표를 던졌다. 1위 노무현과의 표차는 1997년처럼 2%밖에 차이가 안 났다. 그럼 왜 노무현 후보가 저렇게 많이 득표할 수 있었을까?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그곳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는 경남과 부산에서 30%가까이 지지를 받았다. 그렇기에 2%의 작은 격차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낙동강 벨트 3인방(부산 사상구, 북강서을, 사하을) 문성길(문재인, 문성근, 김정길) 후보와 경남 김해을, 통합진보당이 공을 들여온 부산 영도구나 해운대. 기장군에 바람을 일으켜야 되는 이유는 총선에서의 160석 이상 획득과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부산, 경남에서 8~10석을 가져오지 못하면 총선과 정권교체의 꿈은 상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민주당과 혁신과통합, 통합진보당 등 야권연대가 국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니 이제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는 일만 남았다.


-by 검찰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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