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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5 10:48
노무현의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오프닝 세리머니가 문성근 노무현재단 이사님과 남산둘레길에서 시작합니다.
개나리가 진 남산을 노란 노빠들로 물들일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오늘 현재
참가신청 회원님이 90명을 조금 넘은 상태라 상상에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적어도 900명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어린이날, 노무현의 남산을 만듭시다.
시민학교재능위원이라는 동호회가 막 태어났습니다.
작든 크든 우리의 재능을 모아 노무현재단을 키워봅시다.
두 명의 동지 들꽃님과 빠사님이 오늘의 걸봉에 합류했다. 코스는 문화와 예술을 숭상하는 옥천(沃川)역에서 국악도시 영동역까지 28.1km. 인문학코스이다. 동지가 함께 하는 데다 Daum 지도로 검색하니 금강 옆으로 하천길이 군데군데 이어져 좋은 풍광을 끼고 걸을 것 같아 옥천행 무궁화열차의 덜컹덜컹도 장구소리 만큼 흥겨웠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옥천역 앞 정지용의 시비(
그런데 고향에 이런 집이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마을에 담장 기준으로 네다섯 집이 전부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고향이 있다.
새고향을 찾는 세 명이 모이니 일단 정치이야기부터. 상큼한 들녘의 허공으로 도란도란 이야기가 끝없이 퍼진다.
도내도 아니고 군내(郡內)에서 최초로 포도를 심었고, 게다가 비닐을 쒸우는 재배법도 최초로 개발했다고 자랑하는 용운리 마을을 지나자 이원 묘목 자랑비가 나온다. 내용을 알고 보니 자랑할 만하다. 옥천군은 2001년에 최초로 묘목 북한보내기 사업을 시작하여 꾸준히 사과, 배, 포도 등의 묘목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게 창조경제라고 본다.
아무래도 식사는 어울려 해야 제대로 먹는 기분이다. 허겁지겁 숟가락 들고 달려드는데, “기도해야죠!” 뒤통수가 띵하다. 그래서 냉담자 3인은 경건하게 기도를 바쳤고 ... 정치(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작도 안 했나?) 다슬기를 넣은 된장에 밥을 버무려 상추 등 다양한 야채에 올리고 그 위에 돼지고기 한 점 턱 올려놓은 다음에 한놈 한놈 불러대며 아주 우적우적 씨ㅂ어 먹었다. 잘 먹었으니 다시 신발끈을 고쳐 매고!
걷다 보니 문득 오전에 실수 한번 없이 너무 자~알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작업차량 3대가 보이지만 조금 단축하는 길을 택해보자고 일행을 꾀어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물론 고생했다. 가운데에 실개천이 숨어 있었던 것이었따. 신사숙녀 분은 대장 예우차원에서 암 말도 안 했다는.
김문기 유허비(遺墟碑)이다. 문제의 대학교 상지대 사장인 그 ㄴ? 우리의 정치 이야기가 너무 나갔나 보다. 백촌(白村)은 사육신이었다. 1977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기존의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에 백촌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럼 사칠신? 위원회는 숫자의 개념에 억매이지 말자고 사육신을 ‘단종 충신’으로 사육신묘를 ‘단종충신지묘’로 하자는 대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 결론은 어찌 되었을까?
작은 고개 하나 넘고 오후 2시부터는 이렇게 아름다운 금강과 함께 걸었다. 바보님에게 선두를 양보(?)했다. 사진에서 저 앞 점으로 표현되신다. 어느덧 9번의 국도나들이에서 걷는 요령이 생겼다. 직진 길에서는 안전이 허가하는 최대한도에서 마주 오는 차량의 운전자에게 나를 아주 많이 노출시키는 것이다. 좌우로 굽은 도로에서는 굽은 상태에 따라 차도 바깥으로 가거나 안쪽으로 가는 수고가 필요하다.
옥천을 떠나 영동으로. 들꽃님은 등산화에서 빠사님 운동화로 갈아타고 노무현재단 깃발을 어부바 하고 가시는 중 (우측 끝).
국악의 거리 직전에 자리 잡고 있는 쌍청루(雙淸樓).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인 박흥생(朴興生)이 충청도 영동(永同)에 지은 누정(누각과 정자)이다. 부친의 상을 당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여 이 누정을 지은 뒤 여생을 보냈는데 경내에는 이 외에 신도비와 난계 박연(蘭溪 朴堧: 정원에 난초가 많았다고 하여 난계) 선생을 비롯한 6위의 위패를 모신 세덕사 등이 있었다. 휭 허니 둘러보고 나오니 들꽃님 왈, "밀양 박씨 집안에는 뭐 볼거 있다고 헛힘 쓰면서 들어가요?"
바로 옆에 국악의 거리 조형물 이정표. 조금만 내려가면
난계국악박물관과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이 나타난다. 당근 전수관 앞에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다리 조각물은 편종이다. 쇠뿔망치로 쳐서 연주하는 악기인데 고려 때 송나라에서 전해져 와서 박연선생에 의해 개량되었다고 한다. 종 두께가 두꺼울수록 소리가 높아진다. 그 옆에 계신 분이 아내 사랑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빠사님이시다. 마눌님의 잔소리가 최고 옥타브의 종소리가 되더라도 음악으로 감상할 능력이 되시리라 믿고 잪다.
다리 끝 좌측에 세상을 내려다보며 감상 가능한 누각이 있음에도 일행은 수줍게 우측 절벽(?)에 숨어 앉아 있는 정자에 더 눈길을 준다. 짧은 조도(鳥道)로 이어졌는데 꽃만 피면 거기가 무릉도원 되겠다. 모두가 한 사람만 생각했다. 술송님.
먹자도로 국악의 거리를 벗어나자 하한거를 준비하는 벚꽃나무들이 작별을 고하는 열병식을 펼쳐준다. 우로 굽은 신작로를 피해 직선의 농로를 탔다가 다시 대로로. 사실은 예측했던 영동천을 놓쳤다. 전화위복인가. 가면서 보니 천을 따라가는 둑길은 보도가 군데군데 끊겨 있었고 더구나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맨길이었다. 국도가 그나마 운치가 있었던 거다.
갑자기 국악도시 영동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개념 없는 전쟁기념비가 나타난다. “해외월남참전기념탑”이란다. 허 ~ 박정희 잘 났다. 당신은 그 용병짓으로 영원히 기억되겠지. 혹시 그 짓거리가 댁 따님의 창조경제의 원조?
도로를 가운데에 두고 바로 맞은편에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분, 천재적인 음악이론가 난계 선생을 기려 이 도로에 명명한 난계 기념비가 있다. 음악이와 전쟁이가 서로 마주보게끔. 뭐 어짜라는 건지 ... 하긴 히틀러도 오페라광이었으니.
영동전통시장 안내조형물이 이제는 시내에 들어왔음을 알린다. 저멀리 영동교가 보이고 그 너머로 민주지산 등으로 어우러진 소백산맥 등허리가 영동시를 감싸고 있다. 우측으로 가면 아마도 무주 쪽이리.
빠사님은 나에게 간식을 남겨주어 내일의 걸봉을 응원하셨고 들꽃님에게는 운동화를 빌려주셨다. 용의주도한 준비성에 감사드린다. 오이와 딸기, 과자 등 녀자적 준비물로 배낭을 채워오신 들꽃님. 엄청 고생하셨다. 내년에는 어찌 될지 모르는 우리의 몸뚱이, 오늘 수고 많았다. 매 순간에 감사하며 님을 찾아 우리는 이렇게 걸었다.
누적 28.1km / 214.7km 비공식 누적 231.7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