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09
장군차밭
봉하마을이 속한 진영은 감이 맛좋기로 유명합니다. 일반적으로 감은 과수원 재배를 잘 하지 않지만 봉하마을을 비롯한 진영읍 일대는 감나무 과수원을 운영하는 곳이 많았습니다.
퇴임 후 어느 날 봉하 환경 개선에 골몰하던 대통령님은 참모진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대통령을 뵈러 봉하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는 ‘봉하 빌라’ 뒤편(지금의 장군차밭)을 공동묘지로 아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는 것입니다. 감농사가 경제성을 잃고 폐농하는 곳이 많아지면서, 나무가 죽고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에 한산덩굴 등 잡초들이 무성하게 달라붙어 멀리서 보면 무덤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장군차농사는 애초부터 대통령의 계획에 있던 것이지만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작업이 시행되었습니다.
장군차는 김해 인근 여러 마을에서 재배를 하는 작물이기도 하고, 사철 푸른빛을 볼 수 있어서 경관에 좋은 것은 물론, 채산성도 높습니다. 그러나 차 재배는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대통령께서 일손이 부족한 봉하에 일부러 장군차를 택한 이유는, 봉하를 찾는 각지 사람들이 모종부터 제품생산까지 각 과정에 골고루 참여함으로써 자연을 함께 일구는 기쁨을 누리게 하자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골고루 참여’에는 대통령 본인도 포함됩니다. 노 대통령은 평소에도 밭일을 하든 마을청소를 하든 일단 손에 낫을 들었다 하면 그저 시늉에 그치지 않고 주위에 있는 누구보다 능숙하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비서관이나 경호원들은 대통령님이 봉하 식구들 가운데 가장 낫질을 잘했다고 회고합니다.
생가
노무현 대통령은 1946년 9월부터 사법고시에 합격해 부산으로 이사한 1975년까지 30여 년을 봉하마을에서 보냈습니다. 2009년 9월에 복원된 생가를 포함해서 모두 4군데 집에서 살았는데, 출생부터 영․유아기와 학창시절, 그리고 결혼과 출산, 그리고 퇴임 이후까지 치면 ‘평범한 시민 노무현’으로 살았던 시간 대부분을 봉하에서 생활한 셈입니다.
봉하마을 중앙에 있는 지금의 생가는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았습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봉하를 떠나면서 새 주인에 의해 양옥으로 개조되었는데, 대통령 퇴임에 즈음해서 김해시의 도움으로 최대한 원형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었습니다. 달라진 점은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꾼 것 정도입니다.
생가 이후에 살았던 집들은 마을매점을 기점으로 삼각형의 동선을 그리며 모여 있습니다. 매점 왼쪽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바로 오른쪽에 있는 집이 두 번째 산 곳입니다. 세 번째 살았던 집은 아쉽게도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가 지금은 공터가 되었습니다. 봉하를 떠나기까지 살았던 네 번째 집은 마을 회관 왼쪽에 있는 2층 양옥집입니다. 신혼살림을 꾸린 뒤 두 자녀를 낳고, 들녘 너머 뱀산 중턱에 마옥당을 지어 고시공부를 한 것도 이곳에 살 때의 일입니다.
봉하 들녘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에서 굳이 친환경농사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봉하의 자연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봉하가 자연과 사람이 긴밀하게 어우러지는 생명의 장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화포천을 청소하거나 연못을 생태학습장으로 꾸미고, 둠벙(‘웅덩이’의 방언)을 만든 것도 실질적인 이윤이나 미관을 좋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논이나 수중 생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뜻이 큽니다. 친환경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사는 사람을 위해서 짓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 사는 자연생물도 공존할 수 있게 하자는 고민 끝에 얻은 결론입니다.
대통령님은 이에 관해 “거미줄에 아침이슬이 성글성글 맺혀있는 논, 아이들이 텀벙텀벙 뛰놀아도 괜찮은 논, 가을이면 메뚜기들이 조잘거리듯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그런 논이었으면 좋겠다”면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수많은 논의를 거쳤고, 작업 지시도 꽤 구체적으로 내렸습니다.
오리농사의 달인인 주영로 홍성친환경작목회장 등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어 오리와 우렁이를 논에 풀어 키웠고, 논 습지 조성의 좋은 성공사례가 되었던 함안군의 협조로 물달개비, 물방개, 개아재비, 장구애비 등을 봉하 곳곳에 이주시키기도 했습니다.
묘역에서 화포천으로 가는 개울에는 참게를 구해 풀었습니다. 바닷게가 갯벌의 흙을 먹으면서 그 안에 포함된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것과 같은 원리로 화포천을 복원하고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정자
생태연못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습니다. 포근한 정취와 달리 이름이 참 투박한데, 묘역 쪽에 가까이 있는 작은 것을 ‘제1정자’, 생태연못 끝에 있는 커다란 것을 ‘제2정자’라고 부릅니다.
제1정자는 대통령님의 예순 두 번째 생일 전날이었던 2008년 8월 31일, ‘사랑해요’라는 글자가 새겨진 예순 두 번째 생일 떡케이크를 자원봉사자들과 나눠먹으며 덕담을 주고받았던 곳입니다. 마을에서 생태연못으로 가는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제2정자는 (미)생물배양센터장인 ‘반디’ 이만기님이 봉화산 간벌작업을 하면서 나온 나무를 가지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2010년 1월에 만들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새로 초가를 씌워 지붕을 입혔고, ‘사람사는 세상’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판도 달았습니다. 제2정자는 <노무현재단> 문재인 이사장과 함께 하는 ‘대통령의 길 걷기’의 마지막 휴식 코스이기도 합니다.
생태연못 징검다리
생태연못을 끼고 길게 나 있는 산책길을 걷다보면 중간에 둠벙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습니다. 그 앞에 크고 작은 바위를 듬성듬성 박아 나무쪽으로 갈 수 있게 한 징검다리도 보입니다. 이것은 생태연못을 찾는 사람들이 그저 울타리 밖에서 흐드러진 갈대와 연꽃의 정취에 갇히지 말고, 한 걸음 더 다가서 거기에 숨은 자연의 세밀한 부분까지 보게 하자는 대통령님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대통령님은 평소 인간과 자연의 교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몸과 마음으로 먹고 마신 봉하의 자연이 귀향 뒤 생활에도 커다란 영향을 줬다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고사리의 새순을 만질 때의 그 보드라움, 비슷한 듯하면서 저마다 다른 소리로 노래하는 풀벌레, 갖가지 야생화의 향기까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봉하를 방문객들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도 했습니다. 첫 번째 둠벙이 완성되었을 때는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여기서 배수장, 화포천까지 쫙 가자!”며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봉하에서는 자연생태계 환경을 조성하고 농사에도 도움이 되는 둠벙의 수를 계속해서 늘려가고 있습니다.
자은골
묘역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잔디밭 너머 저수지를 지나면 봉하의 숨겨진 절경 ‘자은(子恩)골’과 만나게 됩니다. 대통령께서는 생전에 자은골을 두고 ‘봉하제일경’이라며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귀한 손님이 오면 제일 먼저 이곳에 데려가곤 했습니다. 참모들과 함께 할 때는 손수 사진도 여럿 찍어주었습니다.
절경도 절경이지만 대통령께는 달고 쓴 추억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봉하마을은 지대가 낮아 비가 많이 오면 화포천이 자주 범람했습니다. 당연히 논농사와 밭농사가 수월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오지 마을이라 땅이 없는 사람은 마땅한 일거리를 찾기도 어려웠습니다. 당시 대통령님의 어머니는 자은골 너머 낙동강 유역의 배추밭과 무밭에 일을 다녔는데, 일당 대신 배추와 무를 한아름 짊어지고 캄캄한 자은골을 지나 그 먼 길을 걸어 밤늦게나 집에 돌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은 자은골을 비롯한 봉화산을 “낮지만 높은 산”이라고도 했습니다. 작은 산이지만 골이 아주 깊다는 의미입니다. 대통령님이 어렸을 때 여러 학교에서 자은골로 소풍을 많이 오곤 했는데, 마음껏 놀라고 풀어놓고 나면 아이들끼리 좀처럼 마주치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억새, 새, 그리고 갈대
화포천변에는 갖가지 풀과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룬 곳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헷갈려 하는 것이 ‘갈대’와 ‘억새’, 그리고 ‘새’입니다. 둘 다 크기나 모양, 꽃이 피는 시기까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갈대는 화포천 같은 강 입구나 물기가 많은 곳에 나는 여러해살이풀로 키가 1~3m까지 자랍니다. 갈색이나 고동색의 삐죽삐죽 보리이삭처럼 난 것이 꽃입니다. 갈대 줄기로는 돗자리를 만드는데, 이를 ‘삿자리’라고 부릅니다. 뿌리는 약재로 쓰기도 합니다.
억새는 높은 지대와 낮은 지대에 골고루 분포합니다. 키는 1~2m이며 갈대보다는 꽃이나 줄기가 부드럽습니다. 꽃의 색깔은 희거나 은빛을 내고, 얼룩무늬인 것도 있습니다. 갈대와 달리 잎 가운데 중록이라는 두꺼운 심이 있습니다. 새는 억새와 갈대보다는 구별이 비교적 쉽습니다. 잎이 작고 날카롭지 않습니다.
어느 날 노 대통령이 봉하를 찾은 손님에게 억새와 갈대, 그리고 새를 설명하고 있는데, 주위에 있던 생태전문가가 그 자리에서 ‘새’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무안할 만도 한데 대통령께서는 오히려 웃으면서 “제대로 알게 해줘서 고맙다”며 상대를 배려했다고 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아주 강해서, 뭔가를 새로 배우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게 되었을 때 오히려 더 기뻐하셨습니다.
대통령님 소나무
사자바위에서 봉하 들녘 너머로 보이는 곳이 ‘뱀산’이고, 왼쪽에 작은 섬처럼 생긴 곳이 ‘개구리산’입니다. 뱀산과 개구리산 사이로 난 들길을 쭉 걸으면 경전선 철길과 만나게 됩니다. 철길에 다다르기 직전에 커다란 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봉하에서는 이를 ‘대통령님 소나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권양숙 여사와 들길을 산책하던 노 대통령은 다른 나무들처럼 산비탈에 있지 않고 길 건너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소나무를 보고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곧장 장대에 낫을 달아 손수 가지치기를 했는데, 무슨 일이든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성격이라 널브러져 가지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아 소나무 옆에 작은 단까지 쌓았습니다.
대통령님이 대선광고영상에서 직접 들려주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추모의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상록수’의 노랫말처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른 대통령님 소나무입니다.
마애불과 자은암(子恩庵) 터 동굴
묘역에서 정토원으로 가는 길을 오르다보면 산중턱 왼편에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있습니다. 낮지만 가파른 벼랑을 내려다봐야 보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나라 왕후가 밤마다 꿈속에서 어느 청년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도통한 스님의 힘을 빌려 바위에 가뒀다고 합니다. 오른손은 중생의 두려움을, 왼손은 소원을 이뤄준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마애불 밑에 너른 마당이 ‘자은암’ 터입니다. 인도의 허황후가 돌로 만든 배를 타고 아유타국을 떠나 김해에 와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것을 기념해 지은 4개의 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터 한쪽에 낮은 포복으로 가야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동굴이 있는데, 대통령님을 비롯해 봉하마을 어린이들이 아지트로 많이 애용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겉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안에는 공간이 제법 넓습니다. 예전에는 살쾡이가 살기도 했다 합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나무로 만든 화살로 동굴에 사는 살쾡이를 잡으려다 아깝게 놓친 적이 있다"며 옛날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동굴 오른편에는 말바위가 우뚝 솟아있습니다. 마애불에서 내려다볼 때와 달리 제법 높습니다. 대통령님이 어릴 때 이 바위를 자주 오르내리며 놀았다고 합니다. 대통령께는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공간입니다.
들녘 자전거길
대통령님은 봉하에 돌아오기 전에 많은 것을 준비하고 계획했지만 한 가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손바닥만 한 마을을 득시글하게 했던 방문인파입니다.
처음엔 그저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에 봉하를 찾았던 것이 날이 갈수록 그 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방문객 접대로 보내야 했던 때도 많았습니다. 그나마 ‘만남의 광장’(지금의 사저와 생가 부근)에서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기가 수월했지만 도로나 들길에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될 때도 있었습니다.
묘책을 세운 것이 방앗간 뒤편의 들녘 수로를 기점으로 건너편에 사람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반대편에서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수로는 적당한 경계선이 되는 동시에 안전거리를 최소한으로 가깝게 해주기 때문에 한걸음이라도 더 가까이서 대통령을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꽤 괜찮은 만남의 장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등 뒤로 봉화산이 펼쳐져 있어서 대통령님이 사자바위를 배경으로 방문객들의 사진을 직접 찍어주기도 했습니다.
대통령님의 사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최고로 꼽는, 손녀 서은양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찍은 사진도 이 부근에서 찍은 것입니다.
![]() |
![]() |
![]() |
---|---|---|
공지 |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대하여 (656) | 2009.06.12 |
공지 | [전문] 대통령님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 (1717) | 2009.05.27 |
516 | 노무현의 또 다른 사랑 ‘겨울철새’ 이야기 (30) | 2011.02.16 |
515 | [2월 대화마당] ‘참여정부 위기관리’ 그 해법과 뒷이야기를 듣다 (19) | 2011.02.15 |
514 | 시민주권, 경남 김해에서 ‘대학생 봉하캠프’ 개최 | 2011.02.15 |
513 | “MB 정부는 사이비 보수, 민주·민생·남북관계 등 다 퇴보” (10) | 2011.02.14 |
512 | 명계남, 당신의 ‘복수극 완결편’을 기다리며 (50) | 2011.02.11 |
511 | ‘설거지 정권’ vs ‘비겁한 청와대’ (15) | 2011.02.11 |
510 | 노 대통령 “이제는 한 20만명은 넘어야…세상 바꿔” (65) | 2011.02.10 |
509 | 노무현재단에서 일할 분들을 모십니다 (6) | 2011.02.09 |
508 | [봉하를 찾는 사람들] 애틋함으로 찾는, 그리움으로 남는 봉하 (15) | 2011.02.09 |
507 | 다섯 번째 ‘문재인 이사장과 함께 걷는 대통령의 길’ (47) | 2011.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