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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남, 당신의 ‘복수극 완결편’을 기다리며

2011.02.11


명계남, 당신의 ‘복수극 완결편’을 기다리며
- 명계남과 나눈 ‘노무현과 진보의 내일’



<아큐, 어느 독재자의 고백>(이하 ‘아큐’)이 지난 1월 30일 광주 공연을 끝으로 마침내 막을 내렸다. 3개월 동안 서울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 순회까지 80여 회 공연. 매회 100분여를 거의 홀로, 그것도 혼신의 몸짓과 대사들로 채워나가야 했던 길고도 고단한 여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뒤 홍천 시골집에서 칩거하며 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공식 복귀였고, 2006년 <콘트라베이스> 이후 4년 만의 연극 무대였다.

노무현이, 없다

<아큐>는 ‘달고, 맵고, 쓴’ 연극이다. ‘노무현의 명계남’, ‘명배우 명계남’을 기다렸던 이들에게는 가뭄의 단비처럼 달고, 주류에 안주하거나 편입되기를 빌며 한 손으로 타인의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몫 챙기기에 바쁜 수구 또는 '자칭 보수'들에게는 불이 나게 맵고, 극 속의 ‘아큐’와 ‘명계남’에게 속사포를 맞은 진보진영의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쓰디 쓴 독설이었다. 그렇다면 명계남에게 <아큐>는 어떤 맛이었을까?

<아큐> 종연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 명계남은 의외의 단호한 말로 “처음부터 하기 싫었던 연극”이라고 했다. 풍자를 넘어서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후불제 연극’이라는 다소 모험적인 시도에도 흥행과 비평에서 꽤 성공을 거뒀고, 배우로서도 ‘역시 명계남’이라는 평을 들은 작품이었다.

“그래요. 공연하는 동안에는 배우로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어요. 근데 연극 봤어요? 내 대사에도 수 없이 나오잖아. 이렇게 캄캄하고 좁은 데 모여 앉아 우리끼리 박수치고, 웃고, 울고, 떠들면 뭐해. 저들은 관심도 없는데. 아니, 그보다 노무현이 없는데. 그렇잖아요? 공연하는 내내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라구. 노무현이 없는데, 노무현이 없는데….”

-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일단 사람들이 뭉쳤잖습니까. 뭉쳐서 울고, 웃고, 그러면서 노무현을 다시 만났잖습니까. <아큐>를 본 사람들은 적어도 서로 공감하며 적잖은 위안을 얻었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가졌다고 생각하는데요.

“음, 위안이라…. 그래요. 나도 공연을 하는 동안 어떤 위안을 받았는지도 몰라. 사실 이번 공연은 무대배우로서 감회보다는 하고 싶은 말,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우리 현실과 독재에 대해서 좀 더 강하게, 연극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대사가 아니라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직접 말하는 것처럼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었어. 근데 충분히 그러질 못했어요. 그래서 아쉬움이 참 많아.”



운명이다

1952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 하지만 명계남의 바이오그래피에 붙은 ‘예순’이라는 단어는 그의 나이를 지칭하기보다는 삶의 질곡에 저항하며 달려온 속도계 수치 같은 것이다. 명계남의 지인들이 이따금씩 그를 두고 ‘불량하게 생긴 외모’라며 놀려대는 것은 사실 얼굴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대하는 ‘불량스런 태도’를 빗댄 말이다. 다른 면에서 보면, 봉하 묘역을 설계한 건축가 승효상씨가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늘 자신을 경계 밖으로 내모는 자발적 추방인”이라고 정의한 것과 참 많이도 닮았다.

“노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게 2000년 4․13총선 부산 북강서구을 합동유세 때에요. 유명인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정당의 후보자를 돕는 차원에서 만났다가, ‘어? 이런 사람이 있어?’ 했지. 운명이랄까,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이 어울릴까 모르겠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로 자수성가하고, 부림사건을 겪으면서 세상에 본격적으로 다가서는 그의 삶과 인간 됨됨이에 반했어요.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네티즌, 그러니까, 바닥의 정서를 만나게 되면서 노사모 활동을 시작하게 됐고, 세상을 관심 있게 보다 보니 언론 문제도 점점 선명하게 보이더라구요. <조선일보> 반대투쟁도 그렇게 시작됐구.

노무현을 만나 배우고 얻은 고민과 숙제, 기쁨과 환희의 10년은 배우이자, 아버지이고, 남편으로서 살았던 내 50년의 삶을 통째로 뛰어넘을 만큼 강렬하고 농도가 짙은 시간들이었어. 노무현 이전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노무현과 같이 한 10년만 기억나는걸.”

- 주변에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까도 그러셨잖아요. 노무현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잊힐 리 만무하겠지만, 이제 슬픔을 딛고 예전의 그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셔야죠. 지난 번에 안희정 지사가 <아큐> 공연장에서도 말하지 않던가요. ‘무대에 서 있는 모습에서도 노 대통령을 향한 슬픔과 그리움이 보인다고, 그 마음을 알기에 더욱 예전의 명계남을 다시 보고 싶다’고. 사실 슬픔의 크기가 너무 커보여서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렇다고 내가 그 양반 가신 것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슬퍼하는 사람인 것도 아니야. 내가 괜히 슬픔의 상징처럼 비춰지는데 그렇지 않아요. 대중 앞에 서는 일이 많다 보니 내 얼굴과 표정이 사람들에게 그리 읽힌 거지. 아직도 감당이 안 되는 건 사실이지만.”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

명계남은 지난 10년, 인간 노무현의 성공과 좌절을 온 가슴으로 함께 해온 사람 가운데 하나다. 갖은 어려움 끝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 뒤 언론과 야당, 심지어는 진보진영에게조차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을 지켜본 그의 마음은 십분 헤아리고도 남는다.

- 대통령님 삶에 굴곡이 참 많았죠. 2002년 광주 염주체육관에서의 일은 정말 잊지 못할 겁니다. 흔히들 ‘광주경선의 기적’이라고들 하죠. 그때 분위기 기억하십니까?

“그야말로 기적이었죠. 우리들끼리 그랬어요. ‘야, 이거 되겠냐?’고. 당위성은 분명하지만 여건이 굉장히 어려웠으니까. 노사모에서도 갑론을박 논쟁이 많았고. ‘우리가 대통령 만들려고 노사모 한 건 아니지 않냐’고 반대하는 사람도 제법 됐지. 근데 어떻게 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통령 한다는데, 해야지. 그리고 결국 해냈잖아요.”

- 대통령님 배포가 참 대단하셨죠. 98년 7월에 치러진, 이른바 ‘정치 1번지’인 종로 보궐선거 때도 그렇고요. 당선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내려가겠다고 하셨을 때 참모진들이 극구 말리는 데도 결심을 바꾸지 않고 실행을 하셨으니까요. ‘왜 그렇게 정치를 힘들게 하십니까?’ 물었더니 ‘정치는 원래 힘든 거’라며 ‘남들처럼 쉽게 가려고 하는 거, 그거는 정치 아이다’ 하셨답니다.

“2002년 춘천경선에도 그랬어요. 겨우 7표 차이로 이겼다구. 전날 노사모 회원들 150여 명이 일을 돕는데, 상대 후보 일꾼들이 ‘노무현 빨갱이’라는 전단을 밤새 붙이고 다니는 거야. 우린 괜한 싸움으로 번져 노짱한테 해가 될까봐 그 사람들한테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저 붙이면 떼고, 또 붙이면 또 떼고 그렇게 밤을 새웠어요. 울면서 말이야.

경선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노짱이 기분이 좋았는지 살짝 취해서 노래 ‘어머니’를 부르는데, 어색한 날갯짓이랄까? 훈련소 신병처럼 손을 흔들며 부르는데, 난 더 화가 나더란 말이지. 노래 끝나고 내 자리로 와서는 ‘명계남씨, 할 만합니까, 영화보다 재미있습니까?’ 하시는 거예요. 난 간밤 일로 화가 덜 풀려 ‘이런 추악한 정치판에 왜 서시려고 합니까’ 하며 투덜거렸는데, 노짱이 뭐라고 하신지 알아요?

‘정치인이 자기 뜻을 펴기 위해서는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세력을 키워야 하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추악하게 보일지라도, 그 사람들은 이 나라의 법과 제도를 만들 책임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닥에 있는 사람이 자꾸 물을 주고 잘 키워야 해요’ 하시는거야. 차분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난 지금도 안희정이나 백원우 만나면 묻곤 해요. ‘너 어떻게 온갖 독설로 노짱 욕하던 사람들이랑 같은 복도를 거니냐, 어떻게 대통령님 탄핵했던 놈들하고 마주앉아 있을 수 있냐’고. 나는 시니컬하고 냉소적이니까. 그럼 그 친구들이 그래요. ‘그럼 어떡합니까. 이렇게라도 해서 조금씩 바꿔가야죠.’ 다들 노 대통령 닮아서들 그냥….”



성공과 좌절

- 대통령님은 늘 힘든 길을 택하셨죠.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게 정말 가슴 아픕니다. 돌아가신 이유도, 당신 때문에 우리들이 욕을 먹는 것, 아니 당신 주변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주변에 있는 정치 선후배들, 개혁진보세력, 심지어는 그를 사랑하는 네티즌들까지 싸잡아 매도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보진영이 아옹다옹하며 찢어지는 것이 가장 가슴에 아파요. 대통령님은 훨씬 더하셨지. 마지막으로 뵌 것이 2008년 가을이었는데, 나보고 ‘왜 산속에 있는교, 봉하에서 같이 삽시다. 숟가락 하나만 더 놓으면 되는데’ 하셨는데 흔쾌히 ‘예’라고 대답하지 못했어요.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았고.

우린 노무현한테만 매달리지 말고, 노무현만 찾지 말고 진작에 제2, 제3의 노무현을 찾아야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편의대로, 자기 기준에 맞는 노무현을 찾으려 한 거야. 그게 어느새 갈등으로 번지면서 갈라지기 시작했고.... 준비가 제대로 안됐던 거지. 나를 ‘명짱’이라고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서로 얼굴도 안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니까. ‘국민통합 노무현’을 외치던 사람들이….”

똑똑한 바보 대통령 노무현

- 우리는 노무현을 닮으려고 노력한다고, 닮겠다고 말하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게 사실 쉽지만은 않죠. 정작 자기 것을 버리는 것은 더더욱 그렇고요.

“노무현 대통령은 거기서 출발했거든. 선택과 갈등의 순간이 오면 자기한테 손해가 되는 쪽을 택했어요. 헷갈릴 때는 ‘내가 좀 더 손해 보고, 내가 좀 더 노력하자’는 거였지. 그게 고통을 주는 험한 길이라도 말이에요. 그러니 저 양반이 얼마나 대단한 거야. 그 수많은 결단의 순간마다….

노 대통령이 그럴 수 있었던 건,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내 이익을 위해서 당을 버리지도 않고, 당과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원칙이나 소신을 뭉그러뜨리지 않은 것. 그런 행보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민이 필요했겠어요. 이게 생각만으로는 안 되는 거거든. 3당합당 때도 그랬고. 갔으면 한자리 맡았겠지. 그러나 노무현은 가지 않았어요. 옳지 않은 일에 신념을 깨고 싶지 않았던 거야.”



진보의 미래

-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에서도 야권연대를 이뤄 정권재창출을 하려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과연 최선의 대안이란 무엇일까요?

“지금이라도 '사람사는 세상' 회원들과 모여서 투표를 하거나 정당지지도를 한 번 조사해보세요. 다 다를 거야. 그게 당연한 현상이지만, 지금 이 시점이 아주 중요한 때에요. 근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내년 4월 총선에서 지면 12월 대선의 결과는 뻔해. 이번 대선은 재외동포국민투표가 생겨서 100만 표 정도는 지고 시작해야 하니까. 우리가 그렇게 연합을 이뤄 뛰어도 50~60만 표 차로 겨우 이겼는데 지금은 더 불리하다구. 여러 갈래로 찢어서 싸우면 절대 못 이겨.

- 정당이든 지지자가 누구든 ‘노무현’이라고 하면 일단 다 통하는데, 그 다음이 참 어렵습니다. 뭔가 혁신하고 나아간다는 게 개개인들한테는 참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고요.

“사람으로만 생각지 말고 시스템으로 접근해야 해요. 난 사람들이 좀더 슬기로웠으면 좋겠어. 나를 비롯해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래서 어떻게 해, 누군가는 뭘 해야 하지 않겠어?” 하면서 걱정을 많이 하거든. 현실정치라도 할까? 바르게살기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조기축구회라도 들어가서 동네사람들이라도 설득하고 끌어 모을까?

해야 할 일은 널려 있어요. ‘참여가 세상을 바꾼다’는 위대한 진리, 노짱이 우리에게 숙제로 내려준 것 있잖아요. 만 원이고, 오천 원이고 주머니 털어 십시일반하고, 촛불 때마다 ‘몸빵’ 했잖아. 파는 갈라져도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이들도 있고. 이 사람들이 조건 없이 한나라당이 제3당이 될 때까지 일단 뭉쳐서, 새로운 민주주의적 정당구조, 정당민주화를 꼭 이뤄야 해.”

내 마음속 대통령

‘반드시 되갚아 주겠습니다.’ 노 대통령 묘역 너럭바위 바로 앞쪽에 있는 명계남의 박석 문구다. 대통령 서거 뒤 상주로서 오랜 시간 봉하를 지키며 이를 악물고 가슴에 쓰고 또 쓴 맹세가 박석에 새겨졌다.

- 사람들이 명계남에게 기대하는 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명배우로서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좀 더 많이 보여주는 것, 또 하나는 노무현의 남자로서 다시 일어나 조선일보 반대 투쟁을 할 때처럼, 연단에서 노무현과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 당당한 모습 말이에요.

“노짱을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노력하고 있지만, 봉하에 가면 나를 반겨줄 그 분이 없는 걸. ‘나와 주세요!’ 하면 밀짚모자를 벗었다 썼다 하면서 해맑게 웃어줄 그 사람이 없는 걸. ‘노무현이 없는데, 이제 와서 내가 뭘 한들 무슨 소용이야’ 하는 마음이 절반, ‘그래도 내가 반드시 되갚아줘야지’ 하는 마음이 절반이에요. 미안하지만 솔직한 내 심정이 그래.

어찌됐든 나는 내 방법대로 행동하고 실천할 거예요. 되갚아 드린다고 약속했으니까. 지난달 배달된 소식지와 추모공연 DVD를 보고 밤새 울면서 또 다짐했어요. 그동안 깨닫고 얻은 게 있으니 그 방법대로 할 거야. 불이익에는 분노하면서 불의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도 생각하고. 그게 ‘얼굴 팔린’ 사람으로서, 더 많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해요.”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2001년 명계남은 다른 영화예술인들과 함께 <조선일보> 기고 인터뷰 거부 선언에 참여했다. 그는 “노무현이라는 바보 같은 정치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 일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시작이었지만 무엇보다 선언까지 하게 된 것은 제1차 안티조선 지식인 선언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라며 참여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치열하게 뽑아내려 했던 무소불위의 언론권력, 그 대못을 뽑는 싸움에 명계남도 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조선일보>는 그들의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활용한다. 마치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언론인 양 국민들을 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여기에 현혹된 독자들은 조선일보의 위장술에 넘어가 극우 이데올로기에 동화되기 쉽다. 개혁적인 또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더 이상 이와 같은 '조선일보의 상술'에 기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우리는 이 자리를 마련했다.

-2000년 8월 7일 조선일보 기고 인터뷰 거부 지식인 선언문 중에서

2004년 6월. 명계남은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큰 상을 탄 어느 영화감독에게 보내는 <예술가의 오만·당당함도 ‘조선’ 앞에선 예외?>라는 글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그 감독은 평소에도 진보성향의 정당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힐 정도로 정치적 소신이 뚜렷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해외 수상 뒤 귀국한 감독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는데 기사 제목은 “영화만 계속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한 감독 아닐까요?”였다. 마침 미선과 효순 두 소녀가 미군의 장갑차에 무참히 희생당한 2주기 추모기간이었다.

2002년 사건 당시 대부분 언론은 월드컵 열기에 취해 이를 단신으로만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이조차도 외면하고 있다가 1주일이 지나 오히려 ‘미군이 연 추모행사’ 기사를 실어 슬픔에 빠진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명계남은 이른바 ‘진보성향의 감독’이 미선과 효순의 죽음을 외면한 <조선일보>에 인터뷰를, 그것도  2주기 추모기간에 하면서, “두 소녀의 추모집회에 가지 못해 아쉽다”는 말 뒤에 “영화만 계속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한 감독”이라고 말한 것에 혼란과 실망을 동시에 느꼈다.

명계남이 쓴 편지에는 감독에 대한 기대와 애정, 그리고 대한민국의 언론에 대한 강한 비판정신이 올곧은 필체로 담겨 있다. 그는 말미에 ‘당신의 복수극 완결편을 기다리며’라고 쓰고 감독의 진일보를 비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그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가져온 담배 한 갑을 다 태우고서야 인터뷰가 끝났는데도, 그에게 미처 물어보지 못한 말, 하지 못한 말이 많다. <아큐>를 끝낸 그의 다음 라운드가 어떻게 펼쳐질까?

앞으로 배우 명계남, 노무현의 명계남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모르겠다. ‘노무현이 없는데’ 하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다가도, 한편으로는 그 말이 머잖아 그가 뭔가 통쾌한 한 방을 보여주고 말 것이라는 약속처럼 들리기도 해 기대가 생긴다.  

명계남, 그의 복수극 완결편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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