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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식

[문화탐방 뒷이야기] 올레길에서 만난 ‘산 사람 죽은 사람’

2012.11.09

전화를 받았다. 재단 행사에 참석하실 수 있는지를 묻는 전화. 뭐였지? 불과 일주일 만에 잊었다. 사람세상에서 준비한 서울 도심 올레길 탐방행사에 참여하겠다는 댓글을 달아두었던 기억이 났다. 얼른 대답하고 홈페이지에 들러 행사 내용을 다시 둘러본다. 운현궁. 인사동과 조계종, 그리고 보신각. 9시 50분까지 운현궁 앞으로만 가면 되겠구나.

문화탐방에 신청을 해놓고 성의를 보이지 못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요즘 제정신이 아니다. 한 달 전에 직장을 그만 뒀다. 새로 구하려는데, 많지 않다. 과년하여 혼사를 묻는 이조차 없는 조선시대 별당아씨가 된 기분이 가끔 든다. 세상 살면서 무슨 일이야 없을까마는 그래도 정신이 들락날락거리는 꼴을 속으로 참자니 버겁고, 숨고 싶은 날이 많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 어두운 나날에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떤 소리를 들었기에 백주대낮에 밖으로 나가겠노라 선언한 걸까? 아무도 탓하지 마라. 미워하지도 마라…. 그만 깨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잠이 늦게 들었다.

사람사는 세상 첫 나들이 ‘운현궁의 가을’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시간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재단행사에 참여하지 못했었다. 새옹지마라던가. 회사를 그만두니 재단행사에 빠질 이유가 사라졌다. 나빴던 것이 좋아졌다. 매달 두 번째 수요일에 여는 문화탐방, 오늘 ‘서울 도심 올레길’이 나의 첫 출전이 되는 셈이다.

평일에 서울 한 복판을 함께 걸어보자는 얘기는 숨지 말고 나오라는 그분의 명령이 아니었을까? 숨고 싶은 이유를 걷고 싶은 여유로 만든 재단 사람들의 배려와 의지가 느껴진다. 숨어있는 사람 찾아내서 깨어있는 시민 만들기. 깨어나면서도 바람처럼 왔다가는 근심, 이력서 하나라도 보내놔야 할 텐데. 지금 단풍을 즐기고 고궁을 거니는 호사라니. 기분이 우울함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한다.

폼 나게 등장하고 싶었는데 종로3가에서 갈아타는 3호선 지하철이 겨우 한 정거장 갈 거면서 꼼지락거리다 들어온다. 폼은 고사하고 면박이나 당하지 않을까싶어 마음이 급하다. 미리 보아둔 안국역 4번 출구를 향해 축지법으로 계단을 오른다. 30미터 내려가 ‘운현궁이라는 곳’ 입구에 도착한다. 운현궁, 고등학교 때 시험에 나온다니 소설제목이라고나 외웠지 와보기는 처음이다. 벌써 많은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출석을 표시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40명이 일거에 들어간다. 문화관광해설사 분들을 소개받고 일행을 각 10명씩 쪼개어 출발한다. 수직사 툇마루에 제비새끼처럼 나란히 앉는다. 앉은 채로 서울시에서 지원된 문화관광해설사님의 간단한 소개와 설명을 들으며 ‘운현궁의 가을’을 연다.

운현궁의 역사. 길 건너 현대본사건물 옆의 서운궁에서 운(雲)자를 따와 이름을 지었다. 현 부지가 2천여 평인데 원래는 덕성여대자리 포함하여 1만 평이 넘었었다. 어떤 사람을 대원군이라 하는지 아시나요? 대원군은 왕이 아들이 없을 때 왕을 데리고 들어온 사람이다. 공주와 옹주의 차이는 다 아시죠? 한옥은 원래 2~3년에 한 번 씩 보수를 해야 한다. 보수비용이 만만치 않다. 실제로 흥선 대원군의 후손들이 살았었다. 지금은 서울시에 편입된 재산이다.

노둣돌, 솟을대문 앞에서 들은 ‘100년 전 이야기’

운현궁의 구조. 노안당과 노락당, 이로당만 남아있다. 덕성여대 건물이 다 운현궁 소유였다. 지금 앉아있는 수직사는 경비실이다. 왕자가 없어 대원군의 왕을 들일 때 지명권은 대비가 갖는다. 신정왕후 조대비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명박이 아님)를 추대한다. 당시 나이 12세. 첫째는 16세로 이미 장가를 갔기 때문이다.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수렴’은 ‘바를 늘어뜨리고’, ‘청정’은 ‘대신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뜻이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서정쇄신이 첫 번째 특징이다. 쇄도정치라는 것은 왕비를 자기 집안에서 들여놓고 모든 권력을 독차지 하는 것을 말한다.

쉴 만큼 쉬었으니 움직인다. 10명 소단위로 묶이니 가족 같고 소곤소곤해도 잘 들리니 좋다. 노돗돌과 솟을대문 앞에서 백 년 전 얘기들이 즐겁다. 흥선대원군은 키가 160cm정도로 작았다. 노돗돌은 말을 탈 때 딛고 오르는 디딤돌이다. 솟을대문이 그리 높은 이유는 ‘초혼’ 때문이다. 양반이 탈 수 있는 세 가지 것, 말과 가마 그리고 초혼이다. 이호예병형공 하는 판서는 지금의 장관이고 참판은 차관이다. 정과 종이 있고 각 아홉 품계씩 있으니 조선의 품계는 18가지인데 이중 종2품 이상의 양반들만이 탈 수 있는 것이 바로 초혼이다. 장정 여덟이 잡아 세우는 외바퀴 수렌데 세우면 키가 커서 낮은 대문으로는 드나들 수가 없었단다. 솟을대문을 젖히니 사랑채 ‘노안당’이 나타난다.

노안당 현판글씨가 화제다. 노인이 편안하게 쉬는 곳.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는데 직접 써 주신 것도 아니고 추사 사후 8년에 집자(集字)하여 만든 현판이라는 설명이다. 추사를 좋아했던 석파(흥선 대원군의 호)는 자신이 수제자이기도 하고 추사로부터 ‘난을 당대 최고로 잘 쳤다’는 평도 받았다고 하나 그렇더라도 적당한 글자를 임의로 골라 잇고 ‘완당’ 낙관 찍어 걸어 둔 권력자의 행세가 곱지는 않다. 여름이면 시원하게 4분합문을 걸어올리는 것이 ‘걸쇠’, 오다가다 좋은 글귀 읽으라고 집 기둥마다 하얀 칠판처럼 만들어 글 써놓은 ‘주련’. ‘칸’은 방 개수가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의 수를 말하며 아흔아홉 칸 집이라는 게 절대 방이 99개라는 말이 아니라는 말씀.

노락당, 이로당…운현궁 안채에 들다

마당가운데 정원수가 크면 한자로 곤궁이 되므로 작은 나무를 심었다는 전통. 사랑채와 안채가 있고 별채가 있으며 별채엔 과년한 딸이 기거했다고 하나 ‘과년’의 나이가 몇이었겠냐 물으시니 답하는 이가 없다. 고려처녀의 조공을 끊임없이 요구하던 몽고족 때문에 조기결혼이 유행했으며 18세 이상이면 과년으로 여겼다는 설명에 일행은 역사를 다시 듣는다. 안채가는 길 좌측에 수직사 1/3만한 건물 하나에 밀랍청년 하나가 앉아있는데 설명을 들으니 석파의 왼팔 오른팔 주먹패들이었다 하는 ‘천하장안’이 그것이다. 뭐 ‘천하에 제일가는’이나 ‘장안에 화제인’ 정도 뜻할 줄 알았는데 모르면 가만있으라고 네 자가 각기 사람의 성씨라 한다.

안채로 드니 현판이 또 눈에 든다. 이번에는 ‘노락당’. 뜻은 거의 같다. 현판글씨는 석파와 함께 추사에게 글을 배웠다는 친구 신헌이 썼으며 그는 후에 병조판서, 강화도 조약 전권대사까지 역임했다한다. 친구 잘 두는 것도 타고난 운인 것 같다. 노락당 방안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리는 장면이 밀랍인형으로 꾸며져 있다. 임금이 하루 주무시면 그 침실은 나라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노락당이라는 안채를 두고 뒤에 ‘이로당’이라는 안채가 새로 세워진 이유다. 그래서 운현궁에는 안채가 둘이다. 세검정(현 석파정)이 아름다워 팔라했더니 절대 못 판다 하기에 왕을 하루 데리고 가 재워 빼앗았다는 이야기는 권력의 행태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흥선대원군이 보기에 궁에서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안 되겠다 싶더란다. 부모 없고 재산 없고 가능하면 말도 없는 조용하고 순한 여인 물색하다 딱 눈에 띈 이가 여흥민 씨 민자영이었단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똑똑할 줄이야. 그가 그녀에게 당했단다. 부엌을 들여다보니 찬장 위에 놓인 소반이 눈에 띈다. 소반은 양반집의 상징물로 해주반을 많이 썼다하고 통영반이나 나주반도 유명했다 한다. 다리모양에 따라 개족반, 마족반, 호족반이라 했으니 개족반을 우리말로 하면 ‘개다리소반’이 되겠다. 왕의 반찬은 12첩. 커피는 없었겠으나 열댓 번씩 소반으로 쥐고 날랐을 우리 여인네들의 과거에 연민이 쏟아진다.

또 하나의 안채, ‘이로당‘에 이르러 마당 끝의 큰 바위덩어리 앞에 섰다. 운하연지. 사각의 바윗돌 속을 파내고 물을 담아 연못이라 부르던 것인데 붓글씨 쓸 때 연적에 담을 물을 저장해 두던 곳이라고 한다. 이로당의 특징은 방 한가운데 굴뚝이 있다는 것. 복도는 담벼락위로 노락당과 노안당까지 연결되어있어 흥선대원군이 비 안 맞고 신 안 신고 돌아다니기 편리한 구조를 이룬다. 조각문양 멋진 복도 밑 작은 통로로 머리 살짝 숙여 나가니 넓은 뜰과 그 뒤로 석축이 진로를 막는다. 뒤뜰 너머로 도시의 빌딩숲이다. 그제야 시대를 벗어나 현대로 돌아온다. 석축아래 난 작은 문은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의 문이었고 그 앞의 넓은 대는 난을 내놓고 바람 쐬이던 장소였다 한다. 숭례문, 석굴암 등과 함께 한국의 미로 달력을 수놓던 140년 된 노락당 뒤 창호문이 깊게 늘어서 있다.

유물전시관에 들러 당시 지도와 의복, 누름쇠 등 유물을 본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서정쇄신 말고도 서원철폐와 경복궁 중건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해설을 듣는다. 국립교육기관인 향교와는 달리 우후죽순으로 세워져 비리의 온상이 된 서원은 천여 개가 넘던 것이 47개의 사액서원(현판을 직접 내려준)으로 정비되고, 어느 왕도 엄두를 못 내던 경복궁 중건도 이 시기에 이뤄진다. 경복궁 중건 비용 마련을 위해 상평통보 백배의 가치가 있는 당백전, 그리고 원납전을 발행하기도 한다. 프랑스 미국 등 외세의 강화도 침입흔적도 지도를 따라가며 되짚어 본다. 전시관 밖의 화장실이 깔끔하다. 운현궁 솟을대문 옆의 큰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다.

전통과 현대 건축물의 징검다리 ‘천도교중앙대교당과 민가다헌’

운현궁 탐방을 끝내고 낙원상가를 바라보며 내려오니 우측으로 횡단보도 건너에 천도교중앙대교당이 솟아있다. 건물모양이 흡사 명동성당 같다.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라 한다. 옆 빌딩의 ‘수운회관’ 글귀가 선명하다. 횡단보도를 건너니 대교당부지 모퉁이에 길 쪽으로 면해 세워진 석탑하나가 어색하다. ‘세계 어린이 인권 발상지’라던가?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선생의 업적을 기념하는 비석이라 적혀있으나 뜬금없다. 그러나 방정환선생이 바로 뒤의 천도교 제3대 손병희 교주의 사위라는 설명을 들으니 납득이 된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오랜 세월 잎을 떨궈 냈을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그 앞에 버티고 서있다. 마침 종교행사가 없어 대교당 내부에 들어가 본다. 기둥이 없는 특이한 구조에 하얀 천장이 인상적이다.

옆문으로 나서니 민가다헌이 눈에 들어온다. 처마가 멋진 전통한옥이다. 주변에 민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이 살았던 것 같다. 두 아들에게 똑같이 생긴 집을 지어주셨다 하나 현재는 한 채만 남아 카페 영업 중이었고 다른 한 채는 주차장으로 개조되어 찾아주는 손님들의 차를 쉬게 하고 있다.

골목을 내려서 인사동으로 파고든다. 내리던 길을 오른쪽으로 꺾으니 경인미술관이 나온다. ‘경인’은 서울 인천이 아니라 기증자의 ‘호’라 한다.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옛 모습을 떠올리며 정원이 참 아름다웠으리라 상상해 본다. 들어간 길로 다시 나와 인사동길을 위로 걸으니 곧 쌈지길이 나선다. 인사동 중앙도로의 중앙쯤이다. 쌈지라는 회사가 젊은이들 취향의 악세서리 전문상가를 만든 것이라 하는데 정작 그 회사는 부도가 났고 길만 그대로 쌈지길로 남았다. 공용주차장을 지나 우정국로를 건너니 조계사다 .

일주문 현판글씨가 좌에서 우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문 입구부터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마치 현실의 세계가 아닌 듯 신비롭다. 오백년 묵은 백송이 우리나라 대웅전 중에 가장 크다는 조계사 대웅전 처마를 간질인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어미 코끼리와 옆에 붙은 새끼 코끼리는 달아 붙인 눈망울이 실제 바라보는 눈 같고 가지마다 잎을 동글동글 말아 올린 이름 모를 나무 한그루는 극락에 솟아있을 기둥처럼 든든하다.

사람사는 세상을 보다

해설사님을 따라 옆으로 빠져나가니 곧 체신부(정보통신부?)의 전신인 우정총국이다. 길을 두 번 건너 종로통의 보신각으로 향한다. 서울의 사대문이 품고 있는 인의예지신은 ‘보신각’의 신(信)에서 완성된다. 사대문 안 사람들에게 아침과 저녁을 타종으로 알리던 곳이다. 아침에 33번을 치면 성문이 열렸고 저녁에 28번을 치면 문을 닫았다. 종의 중량은 20톤이고 원본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숨어있고 85년에 제작한 것이 지금의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낮, 서울 한복판에서 보신각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나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단체사진을 찍고 가까이 얻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신의주 순대국집 안쪽으로 40여명이 다 들어찬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소개를 하고 소감을 나눈다. 소개가 끝날 때 쯤 순대국밥이 들어온다. 부부가 다니시는 수원에서 오신 님, 성남에서 오신 님, 남편 분을 이제 돌려놓으신 님이 나와 한 테이블에 계신다. 봉하마을 가는 차편을 이야기하고 화포천 산책로를 얘기한다. 옆 테이블에서는 백암순대 얘기가 나온다. 휴가를 내고 오신 분도 있고 아들 손 이끌고 오신 분도 있고 부부가 오신 분도 있다. 현실의 삶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으시는 표정들이 많다. 그러나 모두 깨어있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느껴진다. 그 자리에서 나는 사람사는 세상을 보았다.

글 : 사람사는 세상 회원 ‘죽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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