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3
새로운 증언 담긴 구술영상 ‧ 노 대통령 육성 ‧ 미공개사진도 최초 공개
사료편찬위 2년여간 작업..국내 최대의 전직 대통령 온라인 사료관 마련
노무현 대통령 관련 사료를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열람하고 검색할 수 있는 온라인 '노무현 사료관'
(http://archives.knowhow.or.kr)이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의 2년여간 작업 끝에 계사년 새해 3일 드디어 문을 열었습니다.
‘노무현 사료관’은 기록과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노 대통령에 관한 방대한 사료를 담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 사료관 중에서도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사료가 진열 ‧ 보관 ‧ 정리되어 있는 최대 규모의 대통령 온라인 사료관이라는 점에서 역사 ‧ 사료 분야에 한 획을 긋는 사건입니다.
노무현재단의 사료편찬특별위원회가 이번에 1차로 공개하는 온라인 사료관에는 ▲노 대통령 생애 사진 5만8,055장 ▲연설 및 강연 영상 644건 ▲전자파일 등 관련 문서 2,013건 ▲추모기록 등 박물 이미지 782건을 합쳐 모두 6만 1,493점이 담겨있습니다.
또 노 대통령의 인권변호사와 정치인 시절 동료 및 보좌진, 참여정부 관계자 등 37명의 증언을 담은 구술영상 65건(총 7시간 분량)과 녹취문도 담겨있어, 노 대통령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증언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노 대통령이 2001년 예비후보 시절에 남긴 자전 구술 육성이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이 구술기록은 노 대통령 서거 후 집필된 자서전 <운명이다>의 텍스트로도 활용됐는데, 녹취 테이프로 남아 있던 ▲ 대선 도전 시기에 밝힌 정당민주화에 대한 생각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7년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활동과 정권교체 등 정치활동에 대한 회고가 들어 있습니다. 자전 구술은 사료관 오픈과 함께 7회(회당 20여분)에 나누어 서비스할 예정입니다.
사료관 오픈 기념 1988년 부산 동구 노 대통령 첫 선거사료 컬렉션웹 전시
한편, 공개하는 사료 중 사료관 오픈 기념으로 노 대통령의 1988년 제13대 부산 동구 국회의원 첫 선거 사료 컬렉션 웹 페이지가 선보입니다. 이 웹 페이지에는 노 대통령이 정치입문 당시 발표했던 ‘내가 걸어온 길’ 글 전문과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꾸민 구술이야기, 선거 홍보물 등 관계 사료들을 모아 놓았습니다. 당시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관계자나 유권자들이 간직한 사진 기증 캠페인도 함께 전개합니다.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위원장 정연주)는 2010년 1월에 구성되어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과 수십년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노무현 대통령 관련 기록을 찾아 모으고, 수집한 사료들을 시스템에 등록하고 정리해 경남 진영 소재 임시기록관에 체계적으로 보관해 왔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면모와 활동, 참여정부 역사를 조명하는 관계자들의 구술 증언을 채록하고 사료 해제 작업을 통해 일부는 재단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 ‘사료이야기’‘구술이야기’를 통해 제공해 왔습니다.
이번에 오픈하는 ‘노무현사료관’에 공개되는 사료들은 노무현재단 사료편찬특별위원회가 수집한 사료 중 일부이며, 나머지는 이후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입니다.
‘노무현 사료관’을 접속하려면 http://archives.knowhow.or.kr으로 들어가거나 노무현 대통령 공식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 을 통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기록을 소중히 여긴 대통령이었습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과 권위주의 정권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느라 대부분의 관계 기록물들을 폐기시키거나 감췄습니다. 그나마 김대중 대통령 때 기록관리 인식이 바뀌었고,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국가기록에 대한 관리가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모든 기록은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뜻이었습니다. 노무현재단은 이 뜻을 받들어 노무현 대통령 사료편찬 사업을 계속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또한, 사료 편찬 사업을 기반으로 ‘노무현 기념관’(가칭) 건립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사료관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노무현 시대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참고자료: 온라인사료관 주요 콘텐츠 목록
■ 노무현사료관 미공개사진(일부)
■ 노무현사료관 서비스 구술영상
구술자 |
구술내용 |
시간 |
강보현 |
사법연수원 시절 교육과정과 동기관계 |
05분00초 |
판사로서 지켜본 초기 변호사 시절 면모 |
03분16초 | |
고호석 |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1) |
08분46초 |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2) |
05분45초 | |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 창립 당일 강제연행 |
04분55초 | |
김병준 |
첫 만남과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활동 |
09분14초 |
지역주의에 대한 정치인 노무현의 철학 |
04분54초 | |
퇴임 후 진보에 대한 고민과 모색 |
05분13초 | |
김원기 |
1988년 국회 청문회 성사과정과 ‘스타 노무현’ |
09분43초 |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와 정치인 노무현의 원칙 |
13분40초 | |
대통령의 국회 위상 및 역할 제고 노력 |
06분29초 | |
김재규 |
부림사건의 배경, 첫 만남과 재판과정 |
08분43초 |
87년 2·7집회를 비롯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활동 |
08분04초 | |
민주화운동 시기 노무현 변호사의 개인적 면모 |
04분20초 | |
김정호 |
퇴임 후 봉하마을 친환경 생태농업 추진과정 |
12분59초 |
노무식 |
육군 상병 노무현의 군생활 |
10분17초 |
박종희 |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농성 당시 현장 방문 |
05분21초 |
서갑원 |
1992년 대선 당시 ‘2030 물결유세단’ 활동 |
08분17초 |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 선출과정 |
10분10초 | |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과정 |
07분06초 | |
서정석 |
사법연수원 시절 교육과정과 동기관계 |
07분16초 |
취임 첫해 사법연수원 동기들의 청와대 방문 |
04분38초 | |
설동일 |
노동문제연구소 창립과 1988년 13대 총선 출마 |
03분00초 |
1995년 부산시장 선거과정과 일화 |
04분36초 | |
과거사 정리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과 실천 |
05분03초 | |
송기인 |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출범과정 및 첫 만남 |
04분25초 |
1988년 13대 총선과 부산 동구 출마과정 |
02분51초 | |
서거 당시와 영결식 당일 상황 |
05분24초 | |
신현대 |
한방주치의로서 접한 대통령의 면모 |
07분24초 |
신현묵 |
‘뉴리더’, ‘우리들’ 소프트웨어 개발과정 |
04분30초 |
홈페이지 노하우(knowhow)와 ‘바보 노무현’ |
05분57초 | |
2000년 16대 총선 낙선과 ‘정치를 하는 이유’ |
01분41초 | |
안희정 |
1995년 부산시장 선거와 노무현 후보의 연설 |
05분16초 |
원칙과 상식의 정치인, 민주주의 지도자 |
06분07초 | |
양승조 |
고교시절 농협시험 낙방, 별명 등에 얽힌 일화 |
04분45초 |
첫 직장과 사법시험 준비 시절의 면모 |
07분03초 | |
결혼과 사법시험 합격 당시 상황 |
05분13초 | |
오종쇄 |
1988년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 현장연설 상황 |
06분00초 |
원진레이온 (3명 집담) |
초선의원 시절 ‘원진레이온 사건’ 진상조사 활동 |
09분47초 |
원희연 |
부산지역정책연구소 활동과 1995년 부산시장 선거 |
07분23초 |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가진 만남 |
03분34초 | |
이길상 |
고교 체육선생님이 기억하는 제자 노무현 |
07분27초 |
2002년 경선 당시 동문 체육대회에서 가진 만남 |
05분11초 | |
이재영 |
첫 노동사건 변론 ‘세화상사 노조탄압’ |
06분17초 |
초선의원 시절 노동법 개정과 국정감사 활동 |
05분19초 | |
이재정 |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 성사과정 |
06분40초 |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 파기와 대통령 당선 |
06분20초 | |
이정우 |
참여정부 사회복지 관련예산 증액과 의의 |
05분32초 |
경제·사회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철학과 원칙 |
07분47초 | |
이해찬 |
노동위 활동을 비롯한 초선의원 시절의 면모 |
05분37초 |
1992년 14대 총선 공천을 둘러싼 일화 |
03분46초 | |
1992년 대선 당시 ‘물결유세단’ 활동에 관한 일화 |
02분45초 | |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 파기와 대통령 당선 |
07분48초 | |
이호철 |
‘6월 항쟁의 야전사령관’으로서 면모와 활동 |
05분34초 |
초선의원 시절 조선일보·주간조선 상대 소송 |
05분57초 | |
1995년 부산시장 선거 당시 지역등권론과 노무현의 선택 |
07분42초 | |
장원덕 |
개업 초기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이야기 |
06분12초 |
정길상 |
고교시절의 가난과 교우관계 |
09분42초 |
첫 직장과 사법시험 준비 시절의 면모 |
05분21초 | |
정원상 |
고교 음악선생님이 기억하는 제자 노무현 |
06분47초 |
최병두 |
부림사건 이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이야기 |
08분08초 |
통일중공업 (4명 집담) |
13대 총선 당선 전후 통일중공업 노조 지원활동 |
07분47초 |
홍경태 |
후원회 운영과정에서 접한 정치인 노무현의 면모 |
07분46초 |
황우석 |
1977년 대전지법 판사로 부임한 당시 일화 |
06분14초 |
대전지법 재직 당시 노무현 판사의 예비군훈련 |
08분05초 | |
- 구술자 총 37명 - 구술클립 65건 / 공개분량 6시간59분49초 |
■ 노무현사료관 사료이야기·구술이야기·사진이야기 목록
구분 |
제목 |
사료이야기 |
97년 통추와 15대 대선 “여야 정권교체, 그리고 다시 국회로” |
91년 공안정국과 야권통합 “노무현과 김대중, 정치적 동지가 되다” | |
90년 3당합당 반대 “이의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 |
88년 만화로 그려진 ‘노무현 의원’ | |
“지역주의 투표, 지역주민에도 득 안 된다" | |
87년 6월 10일, 부산 충무동 시위 '독재타도 함성' | |
2001년 ‘언론과 전쟁불사’ 발언 진의와 언론개혁 | |
91년 조선 명예훼손 소송과 정언유착의 단절 | |
노무현 선거③ 노무현의 마지막 선거, 그 파란만장의 기록 | |
‘세종시’와 ‘균형발전’은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꿈 | |
노무현 선거② “지역주의에 맞서 바보 노무현이 되다” | |
노무현 선거① “가자! 노무현과 함께, 사람사는 세상으로!” | |
88년 현대중공업 연설과 왜곡보도 파동 | |
2002년 대통령선거 투표일 전야 막전막후 | |
명함으로 본 노무현 대통령 발자취 | |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의원의 ‘5공비리와 한판승부’ | |
초등은사들이 말하는 대통령의 어린시절 | |
2002년 그날, 부산과 서울역광장에 울려 퍼진 ‘노무현의 외침' | |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과 변호사 노무현의 구속 | |
대통령 이발사 정주영의 추억과 회환 | |
노조파괴 공작에 울분 쏟아낸 초선의원 노무현 | |
“그날 방명록에는 ‘대통령 노무현’이라고만 적었다” | |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뒤바꾼 사건 | |
김대중‧노무현, 둘이면서 하나였던 대통령 | |
“저 노무현,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자 합니다” | |
구술이야기 |
노무현 대통령 2001년 자전 구술 육성 |
노무현을 부탁한 김대중, 김대중을 선택한 노무현 | |
‘사람에게 투자하다’ - 참여정부 복지사회정책 | |
14명의 구술자들이 말하는 ‘노무현이라는, 사람’ | |
P.S. 노무현 - 먼저 간 그에게 남기다 | |
1988년 노무현의 첫 선거를 말하다① ② | |
‘청와대 셰프’ 신충진 씨가 추억하는 노무현 대통령 | |
사진이야기 |
시골소년, 법조인이 되다 |
김대중과 노무현 | |
국민이 만든 노풍 |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 |
대통령 노무현의 하루 | |
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 | |
내 마음 속 대통령 |
■ 노무현사료관 구술 주요내용
■ 강보현-클립1 사법연수원 시절 교육과정과 동기관계
노무현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7기로 1975년 9월 입소해 2년간 연수원 생활을 했다. 구술자 강보현은 당시 사법연수원의 교육과정과 일과, 그 과정에서 접한 동기 노무현의 개인적인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부담이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로, 그 시절 함께 어울리던 노 대통령은 탐구열이 높았던 동기로 기억한다.
■ 강보현-클립2 판사로서 지켜본 초기 변호사 시절 면모
1980년 들어 구술자 강보현은 부산지법 판사로 변호사 노무현과 다시 만났다. 당시에는 부산에 고등법원이 없었는데 거의 매일같이 대구고법을 오갈 정도로 노 변호사의 사건 수임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관행시해오던 소송절차에 대해 법정에서 법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던 노 변호사의 면모를 접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제17회 사법시험, 제7기 사법연수원 동기이다. 사법연수원 2년차 시보 생활을 부산에서 함께했다. 1980년~1982년 부산지법 판사로 재직했을 때에는 그보다 앞선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한 노무현 변호사와 교류가 이어졌다. 이후에도 사법연수원 동기로서 관계가 지속됐다. 1990년 변호사 개업을 했으며 재임 시기인 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대통령 변론대리인단으로 참여했다. |
■ 고호석-클립1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1)
발톱이 썩어 빠져버릴 정도의 모진 고문을 당한 청년들을 직접 만난 변호사 노무현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들의 공소장에 나오는 책들을 하나하나 다 읽으며 공소사실의 터무니없음도 절감한다. 부림사건으로 구속된 구술자 고호석은 어느 날 변호사 접견으로 시작된 일련의 만남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 고호석-클립2 부림사건 재판과 노무현 변호사의 변모과정(2)
구술자 고호석은 부림사건의 1심 결심 당시 상황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다. 재판부는 예정에 없이 결심재판을 강행했고 최후변론 준비를 하지 못한 노무현 변호사는 격앙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피해자 가족들이 판사에게 밉보여 형량을 더 많이 선고받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 고호석-클립3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 창립 당일 강제연행
1984년 창립된 공해문제연구소에 노무현 변호사는 이사로 참여했다. 창립 장소인 부산 YMCA는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 당하고 실무자들은 연행됐다. 구술자 고호석은 이날 노 변호사가 경찰의 강제연행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까지 노 변호사와 함께해온 실무자들도 상상하지 못한 투사의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 중일 때 강제 연행된 1981년 부림사건 피해자. 변론과정에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사무차장,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사무국장 겸 상임집행위원으로 ‘노변’과 부산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지켰다. 2012년 현재 전교조 부산지부 부설 교육정책연구소 소장,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감사를 맡고 있다. |
■ 김병준-클립1 첫 만남과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활동
구술자 김병준은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주최 행사를 마치고 저녁 자리에서 처음 만난 원외 정치인 노무현의 개인적인 면모를 이야기한다. 구술자는 당시 노무현 최고위원의 지방자치에 대한 인식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아울러 1995년 첫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활발했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주요 활동도 소개하고 있다.
■ 김병준-클립2 지역주의에 대한 정치인 노무현의 철학
‘노무현은 왜 지역주의 문제에 천착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술자 김병준의 답변이다. ‘노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우리 사회 만병의 근원이라고 봤고, 깨려고 노력했고 깨질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역주의 타파가 노무현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 뒤에는 더 큰 이야기가 있다’며 설명을 이어간다.
■ 김병준-클립3 퇴임 후 진보에 대한 고민과 모색
구술자 김병준은 퇴임 후 접한 노무현 대통령의 고민과 모색을 이야기한다. 진보,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던 모습, ‘민주주의 2.0’ 사이트를 운영하고 집필을 모색했던 이유 등을 설명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깨어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계몽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였다고 평가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1993년 9월 문을 연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주최 행사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소장, 자치경영연구원 원장과 이사장 등을 맡으며 활동을 함께했다. 2002년 대선 때 정책자문단을 이끌었다. 인수위원회 정무분과위 간사를 거쳐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청와대 정책실장,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겸 부총리, 정책기획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자서전 <운명이다>는 “김병준 교수는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꾸준히 정책 자문을 해준 유일한 대학교수였다(130쪽)”고 기록하고 있다. |
■ 김원기-클립1 1988년 국회 청문회 성사과정과 ‘스타 노무현’
구술자 김원기는 1988년 13대 국회에서 제1야당 평화민주당의 원내총무로서 청문회와 TV 생중계를 성사시킨 과정, 5공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초선의원 노무현의 면모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청문회를 성사시켰으나 정작 다른 당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단기적으로는 상당히 손해를 봤다’고 웃으며 말한다.
■ 김원기-클립2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와 정치인 노무현의 원칙
구술자 김원기는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둘러싼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그 중 하나는 단일화 이후 권력분점에 따른 인사권 보장을 구두로라도 약속해달라는 정 후보 측의 요구를 노 후보가 거절했다는 것이다. 노 후보는 구술자에게 ‘그럴 바에는 내 소신을 지키다가 낙선하는 걸 통해 정치발전에 기여하는 길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 김원기-클립3 대통령의 국회 위상 및 역할 제고 노력
구술자 김원기는 재임 시기 권력집중의 폐해와 국회의 위상 및 역할 제고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과 면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국회의장 재임 시절 노 대통령이 의장 공관에서 3부 요인과 함께한 제헌절 모임, 국회 관련예산 증액 등을 그 같은 사례로 소개했다. 아울러 임기 후반기 당정관계에 따른 노 대통령의 고충도 언급하고 있다.
3선의 평화민주당 원내총무였던 13대 국회에서 통일민주당 초선의원 노무현을 처음 만났다. 3당 합당 이후 신민당과 통합한 민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이후에는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서 함께 활동했다. 1997년 15대 대선 전후 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에 같이 몸담았다. 2002년 대선에서 노 후보의 정치고문을 맡았고 대통령 재임시절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자서전 <운명이다>는 “대통령 선거를 할 때도 대통령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나의 정치 고문이었다(138쪽)”고 기록하고 있다. |
■ 김재규-클립1 부림사건의 배경, 첫 만남과 재판과정
구술자 김재규는 1981년 부림사건의 배경과 그 과정에서 처음 만난 노무현 변호사의 면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변론을 맡으며 부산 구치소에 면회 온 노 변호사와 첫 만남, 변론과정에서 그리고 판결을 접하며 분노하던 모습 등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 적개심이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싹텄을 것’이라고 말했다.
■ 김재규-클립2 87년 2·7집회를 비롯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활동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민주화운동은 1985년 5월 결성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참여하면서 본격화했다. 구술자 김재규는 이 시기 노 변호사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의 서막을 여는 2월 7일 ‘고 박종철 군 부산시민추모제’ 준비과정에서 노 변호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소개하고 있다.
■ 김재규-클립3 민주화운동 시기 노무현 변호사의 개인적 면모
구술자 김재규는 민주화운동을 함께하던 시절 노무현 변호사가 ‘객지 친구는 5년까지 괜찮다며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줬다’고 기억한다. 자신보다 두 살 어린 구술자를 ‘김형’이라 부르고 함께 술 먹으며 기분 좋으면 어깨춤도 췄다는 그 시절 노 변호사의 개인적인 면모를 접할 수 있다.
1981년 부림사건 피해자로 변론을 맡은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처음 만났다. 1983년 12월 출소 이후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 이사,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사무국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노변’과 80년대 부산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다. 3당 합당 이후인 1992년, 1996년 총선 당시 노 대통령과 같은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산민주공원 관장 등을 거쳐 2012년 현재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
■ 김정호-클립1 퇴임 후 봉하마을 친환경 생태농업 추진과정
구술자 김정호는 2008년 노무현 대통령 퇴임 이후 함께 봉하마을에 정착한다. 평범한 농촌이었던 그곳에서 친환경 생태농업을 통해 노 대통령이 구상하던 미래에 동참하고자 했다. 봉하마을을 지키며 농부로 거듭나고 있는 구술자는 봉하의 상징이 된 오리농법과 우렁이농법 도입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984년 부산대 재학 중 부산시 민정당 지구당사 점거 시도로 구속되어 변호사와 의뢰인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1987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국민운동본부,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함께 했다. 1988년 노 대통령이 결혼식 주례를 맡기도 했다. 노 대통령 재임 중에 청와대 총무비서관실 행정관, 기록관리비서관으로 일했다.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친환경생태농업과 마을 가꾸기 등을 실천해왔으며 2012년 현재 ㈜봉하마을 대표를 맡고 있다. |
■ 노무식-클립1 육군 상병 노무현의 군생활
구술자 노무식은 ‘건봉산 꼭대기’에서 처음 신고하던 상병 노무현의 인상을 ‘병사로서 똥구리해 튼튼하게 잘 생겼더라’고 기억한다. 부대 내에서 별로 없었던 같은 노씨라 더 정이 갔다고 한다. 첫 보직이었던 대대 정보과 상황병의 역할과 일과 등 노무현 상병의 군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입대 이듬해인 1969년 전방 차출에 자원해 강원도 인제 원통 12사단(을지쌍용부대) 52연대 2대대 소총소대에 배치되는데 이때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당시 노무현 상병의 첫 보직은 대대 정보과 상황병이었다. 52연대 2대대는 구술자가 6‧25전쟁 중이던 1952년 6월 소위로 임관해 부임한 첫 근무지이기도 했다. 198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이후 재향군인회 사무총장,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
■ 박종희-클립1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농성 당시 현장 방문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고공농성이 위기상황으로 치달아가던 때 노무현 의원은 국회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현장을 방문한다. 구술자 박종희는 수행원으로 가장해 노 의원 차의 뒷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함께 골리앗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 구술자는 골리앗 크레인을 오를 당시를 회고하며 노 의원의 심경을 헤아려본다.
1980년대 중반 울산 노동운동의 지원 역할을 했던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교류했다. 울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초청강연, 1987년 울산노동문제상담소 설립 등의 활동이 매개가 됐다. 당시 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로서 특히 노동자, 노동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
■ 서갑원-클립1 1992년 대선 당시 ‘2030 물결유세단’ 활동
1992년 14대 대선에서 ‘물결유세단’을 이끌며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해 곳곳을 누비던 노무현 당시 민주당 청년특별위원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구술자 서갑원은 ‘2030’으로 젊은 세대를 특화한 점, 이동식 차량을 이용한 유세 등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선거운동 방식이었다고 평가한다.
■ 서갑원-클립2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 선출과정
1992년 14대 대선 패배 이후 한국 정치의 미래를 준비하던 40대 중반의 젊은 정치인 노무현을 접할 수 있는 구술이다. 구술자 서갑원은 1993년 3월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최고위원에 출마한 배경,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의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선거 과정에서 있었던 당원, 자원봉사자들의 지지와 참여활동도 인상 깊었던 일로 거론한다.
■ 서갑원-클립3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과정
지방자치시대의 주역이 될 풀뿌리 정치인 양성을 표방했던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출범 과정에 대한 구술이다. 이름을 결정할 때 끝까지 ‘실무’라는 두 글자를 고집했던 일화에는 명실상부한 연구소를 꿈꾸었던 정치인 노무현 특유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조세형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 연구소의 면면을 구성하는 과정도 언급하고 있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정치인 노무현의 비서로 인연을 맺었다.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거쳐 그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는 과정과 이후 200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함께했다. 재임기에는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정무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의원이 됐다. |
■ 서정석-클립1 사법연수원 시절 교육과정과 동기관계
구술자 서정석은 1975년 9월 입소한 이후 2년간 사법연수원의 교육과정과 일과, 그 과정에서 접한 동기 노무현의 첫 인상, 개인적인 면모 등을 소개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 동갑으로 옆자리인 13번, 14번에 나란히 앉아 더 친하게 됐다고 한다. ‘연수원에서 가까이 지내면서 오랫동안 만난 사람처럼, 껄끄럽게 느껴지는 거 없이 친하게 됐다’고 회상한다.
■ 서정석-클립2 취임 첫해 사법연수원 동기들의 청와대 방문
취임 첫해인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사법연수원 시절 가깝게 지냈던 동기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구술자 서정석은 이때 잠바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동기들을 맞으러온 노 대통령의 모습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또 관저로 올라가는 경내버스 안에서 연수원 시절 때와 같이 옆자리에 앉았던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제17회 사법시험 동기로 사법연수원 시절을 함께 보냈다. 동기들 가운데 노 대통령과 46년생 동갑이라는 인연으로 절친하게 지냈다. 1980년대 대구에서 판사로 재직할 당시 부산에 고등법원이 없어 대구고법을 오가던 노무현 변호사와 자주 만났다. 1996년 개업 이후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재임 시기 및 퇴임 후에 사법연수원 동기들과 청와대, 봉하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
■ 설동일-클립1 노동문제연구소 창립과 1988년 13대 총선 출마
노무현 변호사가 1985년부터 운영한 노동법률상담소에 비해 노동문제연구소 설립 활동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노 변호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본격 노동문제 연구기관인 동시에 노동조합의 고문변호사제도를 도입한 부산 노동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 대한 구술자 설동일의 회고다.
■ 설동일-클립2 1995년 부산시장 선거과정과 일화
구술자 설동일은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기획단장을 맡아 노무현 후보를 지원했다. 선거과정과 가까이서 접한 노 후보의 면면에 관한 구술이다. ‘악수라도 하시라’는 구술자의 말에 ‘남의 잔치에 와서 그러면 안 된다’며 송기인 신부가 초청한 성당 행사에 참석만 하고 자리를 뜨던 일화를 인상 깊게 기억한다.
■ 설동일-클립3 과거사 정리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과 실천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기 구술자 설동일이 사무처장을 맡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과 의의를 설명하고 있는 구술이다. 정수장학회 문제, 제주 4·3사건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의 시효를 배제하지 못한 점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1981년 부림사건 피해자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노 대통령이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 기획단장을 맡았다. 2002년 부산민주공원 관장, 2006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2012년 현재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 송기인-클립1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출범과정 및 첫 만남
구술자 송기인은 노무현 변호사가 민주화운동 대열에 본격 합류하는 계기가 된 199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설립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노 변호사를 처음 만난 건 그보다 앞선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재판과정에서였다. 고전에 나오는 등장인물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는 걸 보고 ‘머리가 비상하다’고 느꼈다고 회고한다.
■ 송기인-클립2 1988년 13대 총선과 부산 동구 출마과정
1988년 13대 총선 출마과정에 대한 구술이다. 당시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으로부터 추천 요청을 받았던 구술자 송기인이 직접 노무현 변호사에게 권했다. 애초 부산 남구를 생각했다가 노 변호사가 동구를 원해 출마지역이 바뀌는 과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당선되자 정작 구술자는 ‘잘못해서 고생하면 어쩌나’ 맘이 불편했다고 한다.
■ 송기인-클립3 서거 당시와 영결식 당일 상황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일부터 영결식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술자 송기인은 양산의 부산대병원, 논의 끝에 서울에서 치른 영결식과 서울광장, 수원 연화장을 거쳐 다시 봉하마을로 돌아가는 과정과 당시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는다. ‘촌놈’이라 기억하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덧붙인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변호인단에 참여한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노 대통령에게 ‘유스토’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기도 했다. 자서전 <운명이다>는 이때를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많은 정성을 쏟으셨다(82쪽)”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경남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리며 참여정부 때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
■ 신현대-클립1 한방주치의로서 접한 대통령의 면모
구술자 신현대는 2003년 2월 최초의 대통령 한방 주치의로 임명되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재임 중 노 대통령의 건강을 살피면서 경험한 배려심, 유머, 한방에 대한 관심 등을 일화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한의학서 ‘신농본초경’을 알고 있던 노 대통령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한방주치의로 임명되어 2008년 2월 퇴임까지 함께했다. 주치의로서 대통령과 그 가족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이 주 업무였으며 해외 순방 및 휴가 시에도 수행했다. 대통령 한방주치의를 둔 것은 참여정부가 처음이었다. |
■ 신현묵-클립1 ‘뉴리더’, ‘우리들’ 소프트웨어 개발과정
구술자 신현묵은 1996년 프로그램 개발 의뢰인으로 처음 만난 정치인 노무현을 기억한다. 인명관리프로그램으로 개발된 ‘뉴리더’의 버전업과 ‘우리들’ 소프트웨어 개발에 대한 이야기지만, 기술적인 내용이 전부는 아니다. 프로그램 설계에서부터 소통을 중시하고 공유를 높은 가치로 삼았던 노 대통령의 철학이 엿보이는 구술이다.
■ 신현묵-클립2 홈페이지 노하우(knowhow)와 ‘바보 노무현’
노하우(knowhow) 홈페이지를 처음 만들던 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곳에서 그 일단을 접할 수 있다. 구술자 신현묵은 노하우라 이름붙인, 로그인 기능이 사라진 사이트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한 2000년 16대 총선 낙선 직후 노 대통령이 노하우에 쇄도한 많은 응원 글들을 읽으며 정치를 계속할 힘을 얻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신현묵-클립3 2000년 16대 총선 낙선과 ‘정치를 하는 이유’
‘정치가 도대체 뭐예요?’ 5년 남짓 함께한 기간 동안 구술자 신현묵은 정치에 대해서 딱 한번 물어봤다. 2000년 16대 총선 낙선 이후 사적인 자리에서였다. 그때까지 총 네 번, 부산에서만 세 번째 낙선한 정치인 노무현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정치란 어떤 의미이고,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길지 않은 이야기이다.
1996년 하반기 ‘뉴리더’의 새로운 버전을 만드는 일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이래 ‘우리들’ 소프트웨어 개발과 ‘노하우2000’ 초기 버전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1997년 3월 16일 결혼식에 노 대통령이 주례를 서기도 했다. 그 같은 인연이 2010년 5월 주간지 ‘한겨레21’ 811호에 소개된 바 있다. |
■ 안희정-클립1 1995년 부산시장 선거와 노무현 후보의 연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선거과정에서 나온 지역등권론으로 지역주의 바람이 다시 거세지면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열기도 식어갔다. 구술자는 그 과정에서 있었던 노 후보의 범일동 매축지시장 유세현장을 이야기한다. 현장의 분위기는 냉랭했고 그럼에도 노 후보는 씩씩하게 연설을 이어나갔다. 구술자는 그 장면이 “가슴 아리게 아팠다”고 기억한다.
■ 안희정-클립2 원칙과 상식의 정치인, 민주주의 지도자
원칙과 상식, 민주주의자, 진보주의자. 구술자가 정리한, 노무현을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이다. 구술자는 특히 진보, 보수라는 구분 이전에 노무현의 원칙과 상식, 민주주의 철학에 주목한다. 아울러 그러한 가치와 철학을 뒷받침하는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얘기를 안 하고, 제 논에 물 대는 일을 안 하는 정치인 노무현’을 이야기하고 있다.
19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처음 함께 일했다.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이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자치경영연구원에 몸담았다. 1996년 총선, 1998년 종로 보궐선거, 2000년 총선 과정에 참여했으며 2001년 대통령후보 경선사무실 사무국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 비서실 및 대통령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으로 대선과정을 함께했다. 2007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을 거쳐 2010년 충남도지사에 당선됐다. 자서전 <운명이다>는 구술자를 “오랜 동지(207쪽)”라고 기록하고 있다. |
■ 양승조-클립1 고교시절 농협시험 낙방, 별명 등에 얽힌 일화
부산상고를 함께 다닌 친구가 기억하는 고등학생 노무현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구술자 양승조는 노 대통령이 고교 재학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명이었다. 가깝게 지낸 계기가 되었던 독서실 생활, 자신만만해하던 농협시험 낙방, ‘오수(낮잠)챔피언’이라는 별명 등에 얽힌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 양승조-클립2 첫 직장과 사법시험 준비 시절의 면모
노무현 대통령이 첫 직장인 삼해공업을 퇴사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기까지 과정과 군 복무시절 구술자 양승조의 집을 오가며 있었던 소소한 일화들이 소개된다. 고시공부를 시작할 즈음 한 달에 한번 정도 부산으로 나오면 술을 사주던 구술자에게 ‘술 사줄 돈으로 차라리 책을 사주는 게 어떠냐’고 했다고 한다.
■ 양승조-클립3 결혼과 사법시험 합격 당시 상황
구술자 양승조는 1973년 1월 29일 봉하마을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결혼식에 참석해 결혼식 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에 초청 받은 두 명의 고교동기 중 한명이었다. 결혼식 후 친구들과의 뒷풀이, 결혼 앨범을 잃어버렸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1975년 3월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 직후의 만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현 개성고등학교) 53회 동기로 고등학교 시절 같은 독서실에 다니다 친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마옥당에서 함께 사법고시 준비를 한 적도 있다. 노 대통령의 결혼식에 초대된 두 명의 고등학교 동기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런 인연으로 이후 노 대통령의 주요 선거 때마다 힘을 보탰다. |
■ 오종쇄-클립1 1988년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 현장연설 상황
1988년 12월 현대중공업 노조의 128일 파업이 시작됐다. 파업 서두인 12월 26일 초선의원 노무현의 현장연설이 있었다. 구술자 오종쇄는 현장연설이 이루어진 과정, 파업 노동자들의 반응과 분위기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술자는 그날의 연설이 여론의 뭇매로 수세에 몰려있던 노동자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다고 기억한다.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울산 현대엔진 노조 결성의 주역 중 한명이다. 현대중공업 파업 과정에 수차례 구속됐고 노무현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다. 1999년 금속연맹 부위원장을 거쳐 2007년 현대중공업 17대 노조위원장에 선출됐으며 18대까지 연임했다. ‘연구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노조문화’를 표방하며 2007년 노동조합 내에 노동문화정책연구소를 만들어 운영해왔다. |
■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관련자-클립1 초선의원 시절 ‘원진레이온 사건’ 진상조사 활동
1988년 7월 신문보도로 공론화한 원진레이온 산업재해의 진상을 밝히고, 피해자와 회사 간 합의 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국회 노동위 소속 노무현 의원에 대한 구술이다. 구술자들은 원진레이온을 방문해 이황화탄소 오염이 특히 심했던 방사과에 거침없이 들어서던 당시의 모습을 인상 깊게 이야기하고 있다.
구술자 박무영은 구리노동상담소 소장으로 일하던 중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피해 상황을 접하고 이를 언론에 알리는 등 피해자 구제활동에 앞장섰다. 구술자 박치성과 한창길은 1988년 원진레이온에서 일하던 산업재해 피해 당사자이다. 원진레이온 산업재해가 공론화 할 당시 국회 노동위원회 소속 노무현 의원은 진상조사반의 일원으로 현장을 방문 조사하는 등 피해자 지원활동에 나섰다. 1988년 9월 14일 1차합의서에는 노 의원의 친필 서명이 들어있다. |
■ 원희연-클립1 부산지역정책연구소 활동과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원외 정치인 노무현이 1994년 설립한 부산지역정책연구소에 관한 구술이다. 연구소는 부산의 정책현안 도출, 서울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와 연계한 지방정치학교 운영 등의 사업을 전개했다. 구술자 원희연은 연구소 기획실장으로 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부산에 오면 연구소에 마련된 간이숙소에서 자거나 아침에 같이 우동을 먹던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 원희연-클립2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가진 만남
구술자 원희연은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지역의 젊은 학자들과 함께 봉하마을을 방문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이들을 직접 안내하며 봉화산 일대를 돌아보고 저녁에는 삼겹살에 소주도 한 잔 했다. 봉하마을 가꾸기와 민주주의 2.0 등 퇴임 후 구상과 활동에 몰두하던 당시의 면모를 접할 수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연구 활동에 매진하던 중 노무현 대통령이 1994년 설립한 부산지역정책연구소 기획실장으로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연구소 재직기간이었던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도 참여해 정책 및 공약개발을 담당했다.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자문위원을 맡았고 2003년 전략산업기획단 단장으로 국책사업 평가 업무를 진행했다. |
■ 이길상-클립1 고교 체육선생님이 기억하는 제자 노무현
부산상고 재학시절 고등학생 노무현의 인상, 체육활동과 두발단속 등에 관한 일화를 접할 수 있다. 구술자 이길상은 부산상고 교사로 체육 과목과 생활지도를 담당했다. 구술자는 2003년 5월 은사들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행사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들을 상기하고 있다.
■ 이길상-클립2 2002년 경선 당시 동문 체육대회에서 가진 만남
구술자 이길상은 2002년 5월 26일 부산상고 개교 107주년 기념 체육대회에 새천년민주당 대통령후보이자 동문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제자 노무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교 운동장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하며 ‘이렇게 모셔서 죄송하다, 소풍 온 기분으로 먹자’던 제자의 말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재학 시기(1963~1966) 3년 간 체육과목을 가르쳤다. 학생지도부 교사로 두발단속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200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열렸던 부산상고 동문 체육대회, 2003년 5월 청와대 초청오찬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만남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
■ 이재영-클립1 첫 노동사건 변론 ‘세화상사 노조탄압’
구술자 이재영은 노무현 변호사가 처음 맡은 노동사건 ‘세화상사’의 해고자이다. 첫 만남에서 노 변호사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설명하자 ‘사람 사는 곳인데 그럴 리가 있나’라며 쉬이 믿지 못했다고 한다. 사건을 맡으면서 노동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해고자들과 함께하던 노 변호사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 이재영-클립2 초선의원 시절 노동법 개정과 국정감사 활동
구술자 이재영은 초선의원 노무현의 노동담당 비서를 지내면서 이 시기 노동법 개정에 주력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특히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권 강화에 중점을 뒀다고 설명한다. 국정감사에서는 인기 위주의 폭로성 질의는 지양했고 제도개선 등 대안을 중시하는 의원이었다고 기억한다.
부산상고 후배로 학창시절 동문 선배 자격으로 특강을 온 노무현 변호사를 본 적이 있다. 1985년 3월 당시 노 변호사가 맡은 최초의 노동사건인 ‘세화상사’ 노조 해고자로 다시 만났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정치 입문 이후 출마 때마다 선거운동을 도왔다. 초선의원 시절에는 노동문제 담당 비서로 상임위 활동을 보좌했으며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분과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
■ 이재정-클립1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 성사과정
구술자 이재정은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새천년민주당 유세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이르기까지 노무현 후보의 고민과 결단, 관련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단일화 여론조사 당일 구술자의 제안으로 당직자들과 가진 주일예배는 ‘눈물의 기도’가 됐다고 회고한다.
■ 이재정-클립2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 파기와 대통령 당선
2002년 12월 18일 대선 유세 마지막 날 벌어진 정몽준 의원의 지지 철회와 그에 따른 당내 분위기, 새벽까지 이어진 대책 논의, 노무현 후보의 대처와 선거 승리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구술자 이재정은 명동유세에서 지지철회,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이틀간의 과정을 돌아보며 ‘드라마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2000년 12월~2001년 11월 새천년민주당 연수원장 시절 16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당원 교육강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교육특보, 유세본부장 등을 맡았다. 참여정부 들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거쳐 2006년 12월부터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며 남북정상회담 진행과정에 참여했다. |
■ 이정우-클립1 참여정부 사회복지 관련예산 증액과 의의
참여정부 기간 정부예산에서 차지하는 사회복지 관련예산 비중은 2003년 20.2%(41조7천억 원)에서 2008년 29%대(67조7천억 원)까지 늘었다. 같은 기간 경제예산은 비슷한 비중으로 역전됐다. 구술자 이정우는 사회복지 관련예산 증가가 가지는 의의와 ‘동반성장’이라는 작명에 담긴 노무현 대통령의 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 이정우-클립2 경제·사회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철학과 원칙
구술자 이정우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거부하고 단기적인 성장률에 연연하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의 면모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경제·사회정책에 대한 노 대통령의 철학과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를 교정하려 노력한 대통령, 성장지상주의에서 벗어난 최초의 장기주의(長期主義) 대통령으로 평가한다.
대선후보 시절 정책자문단에 참여하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간사를 거쳐 참여정부 청와대 초대 정책실장을 맡았다. 이후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대통령 정책특보 등을 역임했다. 퇴임 후에도 ‘진보의 미래’, ‘국가의 역할’ 등을 놓고 집필을 모색하던 노 대통령과 의견을 나눴다. |
■ 이해찬-클립1 노동위 활동을 비롯한 초선의원 시절의 면모
구술자 이해찬은 1988년 13대 국회에서 같은 초선의원이자 ‘노동위 3총사’로 활약했던 노무현 의원과의 인상 깊은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왕성했던 노동현장 지원활동과 ‘리갈 마인드’(legal mind)가 뛰어났다는 초선의원 노무현의 면모를 이야기한다. 노동현장에 가서는 ‘자기의 온몸을 던졌다’고 표현했다.
■ 이해찬-클립2 1992년 14대 총선 공천을 둘러싼 일화
구술자 이해찬은 1991년 6월 광역의원 선거를 앞두고 시의원 공천 문제로 당시 신민당에서 탈당한다. 신민당은 이후 노무현 의원이 있던 민주당과 통합해 1991년 9월 민주당으로 출범한다. 구술자는 자신의 민주당 복당(復黨)과 이듬해인 1992년 14대 총선 공천을 둘러싼 노 의원과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 이해찬-클립3 1992년 대선 당시 ‘물결유세단’ 활동에 관한 일화
구술자 이해찬은 1992년 14대 대선 때 ‘물결 유세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과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구술자는 당시 노무현 전 의원과 함께 김대중 민주당 대선후보의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물결 유세단에 얽힌 일화를 구술자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맺은 신뢰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이해찬-클립4 2002년 대선후보 단일화 파기와 대통령 당선
구술자 이해찬은 2002년 16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정몽준 의원의 단일화 파기에서부터 자택방문 과정,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상황을 노무현 후보의 행보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투표 당일 오전과 오후 달라지던 득표 상황도 인상 깊게 기억한다. ‘대통령되는 길은 정해져있구나,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제13대 국회 초선의원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노동위에서 활약했다. 3당 합당 이후 신민당과 통합한 민주당에 함께 있었으나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다시 당적이 갈렸다. 노 대통령이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로 입당한 이후에는 줄곧 같은 당에서 활동했다. 노 대통령이 1998년 종로 재보선을 통해 10년 만에 재선의원이 되고 교육위를 맡을 당시 교육부 장관으로 상임위에서 만나기도 했다. 2002년 대선 때 중앙선대위 기획본부장을,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
■ 이호철-클립1 ‘6월 항쟁의 야전사령관’으로서 면모와 활동
노무현 대통령의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는 1987년 6월 항쟁 전후 시기, 구술자에 대해 “부산민주시민협의회와 국민운동본부 일을 하면서 그 친구와 난 아주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가 되었다(217쪽)”고 적혀있다. 이 시기 직접 차를 몰고 구술자와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던 에피소드를 비롯해 당시 ‘노변’의 면모와 활동을 접할 수 있다.
■ 이호철-클립2 초선의원 시절 조선일보·주간조선 상대 소송
초선의원 노무현은 1991년 10월 주간조선의 <통합야당 대변인 노무현 의원 과연 ‘상당한 재산가’인가> 기사가 허위·왜곡보도라며 조선일보사, 주간조선 편집인·해당 기자를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과 사과광고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은 1992년 12월 노 의원의 승소로 마무리됐다. 소송과 재판과정에 대한 구술이다.
■ 이호철-클립3 1995년 부산시장 선거 당시 지역등권론과 노무현의 선택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는 내내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다 지역등권론이란 변수에 부딪혔다. 지역주의가 다시 출렁였다. 선거캠프의 참모들은 민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자고 권유했다. 노 후보는 ‘그렇게 정치해서는 안 된다’며 정면 돌파를 택했다. 구술자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순간이다.
1982년 부림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당시 변론을 맡은 노무현 변호사를 법정에서 처음 만났다. 이때의 인연을 시작으로 87년 6월 항쟁 전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등에서 ‘노변’과 함께 활동했으며 1988년과 1992년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2000년 총선, 200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주요 선거과정에 참여했다. 초선의원 시절 보좌관을 맡았고 참여정부 들어 민정비서관, 제도개선비서관, 국정상황실장,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봉하마을에서 친환경생태농업, 마을 가꾸기 등 노 대통령의 퇴임 후 활동을 보좌했다. |
■ 장원덕-클립1 개업 초기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이야기
초기 변호사 시절 부당함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던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구술이다. 구술자 장원덕은 판사의 불공정한 재판 진행에 항의하며 법정을 뛰쳐나간 이후 결국은 사과를 받아내던 노무현 변호사의 일화를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사무실 직원들의 처우 개선에 노력하고 격의 없이 지내던 면모도 소개한다.
대전지법 판사직을 정리하고 1978년 6월 부산에서 개업한 날부터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했다. 초기 변호사 시절부터 이후 변모과정을 가까이서 접했다. 1982년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거쳐 1995년 법무법인 부산으로 법인체제가 정착된 후 사무국장을 맡아 2012년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
■ 정길상-클립1 고교시절의 가난과 교우관계
구술자 정길상은 널리 알려진 부산상고 시절 ‘영양빵 일화’의 주인공이다. 가난한 고등학생 노무현이 친구에게 빵을 사주고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알고 있었던 동기 노무현을 호기심에 담배 피우는 과정에서 첫 대면했다고 회상한다.
■ 정길상-클립2 첫 직장과 사법시험 준비 시절의 면모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상고를 졸업하던 1966년 2월 농협 입사시험 치른 날을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이건 시험도 아니다’고 할 만큼 쉬웠다고 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이후 첫 직장 삼해공업을 퇴사한 경위, 공사장 노무자로 일하다가 사법시험 도전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된 날 함께 했던 일화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53회 동기로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알고 있었던 노 대통령을 호기심에 담배 피우는 과정에서 첫 대면했다고 한다. 졸업 이후 사법시험 준비기나 군대 시절에도 서로 소식을 전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정치 입문 이후에는 친구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
■ 정원상-클립1 고교 음악선생님이 기억하는 제자 노무현
구술자 정원상은 부산상고 음악교사 재직 당시 음악실에서 잠을 자던 학생 노무현을 꾸짖은 기억이 있다. 그것이 장거리 통학으로 인한 피곤함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이후 가난한 제자 노무현에게 차비와 책값 등을 보태주었다. 구술자 자신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으나 노 대통령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다.
1960년부터 1967년까지 부산상고 음악교사로 재임하던 중 3년간(1963~1966) 노무현 대통령을 가르쳤다. 교사와 학생으로서뿐 아니라 동생 정길상의 친구로서 인연도 가지고 있다. 2003년 5월 청와대 초청 오찬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만남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
■ 최병두-클립1 부림사건 이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 이야기
구술자 최병두는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이 문을 연지 4년째 되던 1982년에 입사했다. 직원들에게 매일 아침 직접 민사소송법을 가르치며, 법원을 상대하면서도 당당함을 주문하던 노무현 변호사를 기억한다. 노 변호사가 당시 형사사건을 맡지 않으려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3년 후배. 1982년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에 입사해 1989년까지 사무장으로 재직했다. 노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입문하기까지 과정을 접하면서 그 시기 사무실 살림을 도맡았다 |
■ 통일중공업 노조-클립1 13대 총선 당선 전후 통일중공업 노조 지원활동
1984년 노조 결성 이후 창원 공단 내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통일중공업 노조 조합원들의 인권변호사 노무현, 초선의원 노무현에 관한 구술이다. 인권변호사로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전혀 서민적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점거농성장에 밤늦게 통닭과 소주를 들고 찾아왔던 노무현 의원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임수관 / 전 통일중공업 노동조합 부위원장 1986년도에 통일중공업에 입사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수차례 구속과 석방을 오가며 오랜 해고자 시절을 견뎠다. 유수종 / 전 통일중공업 노동조합 사무국장 1984년도에 통일중공업에 입사해 1988년 2차 지도부 시기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류해춘 / 전 통일중공업 노동조합 조합원 1984년도에 통일중공업에 병역특례병으로 입사, 87년 2월 특례기간 중에 노동조합 탄압의 일환으로 해고되었다. 해고무효소송 건으로 노무현 변호사와 만났다. 87년 8월 이석규 열사 장례식 관련하여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은 후 구속 상태이던 자신을 직접 찾아와 ‘변론을 계속 담당할 수 없게 되었다’던 노 대통령을 기억하고 있다. 황선엽 / 전 통일중공업 노동조합 부위원장 1985년도에 통일중공업에 입사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 동안 구속자 석방과 해고자 복직을 위한 서울 민주당사 점거농성에 참가하면서 첫 구속되었고 이후 복직하여 통일중공업 노동조합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
■ 홍경태-클립1 후원회 운영과정에서 접한 정치인 노무현의 면모
구술자 홍경태는 부산상고 재학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하며 동창들 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점이 고등학교 선배인 원외 정치인 노무현의 후원회 담당으로 동창들의 추천을 받는 계기가 됐다. 1993년 하반기 최고위원 시절부터 2002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후원회 활동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8년 후배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야구선수로 동문들 사이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 재경동문회 선배들의 추천과 권유로 1993년 당시 원외 정치인 노무현 최고위원의 후원회 업무를 맡기 시작해 2002년 대통령선거에 이르기까지 역할이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중에는 청와대 총무비서관실 행정관으로도 근무했다. |
■ 황우석-클립1 1977년 대전지법 판사로 부임한 당시 일화
구술자 황우석은 1977년 9월 대전지법에 부임한 노무현 판사가 원로 변호사들을 먼저 찾아가 인사하던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당시에도 판사가 변호사들에게 부임 인사를 하는 경우는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대전지법 총무과에서 근무하던 구술자는 차를 몰고 초임판사 노무현의 부임 인사 길을 안내했다.
■ 황우석-클립2 대전지법 재직 당시 노무현 판사의 예비군훈련
노무현 대통령은 최초의 사병 출신 대통령이었다. 대전지법 판사 재직시절에도 예비군훈련을 받았다. 구술자는 예비군훈련 일정을 빠짐없이 소화하고, 집합하면 맨 뒷줄에서 “하나 결”, “둘 결”을 외치던 모습, 훈련 일정 중에 점심과 저녁을 함께하던 판사 노무현의 면모를 인상 깊게 이야기하고 있다.
1970년부터 1997년까지 30년 가까이 대전지법 총무과에서 근무했다. 사법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1977년 9월 대전지법으로 부임한 판사 노무현을 만났다. 공군 하사관 복무 경력으로 대전지법 직원들의 예비군훈련 일정을 챙기기도 했는데 이때 당시 노무현 판사의 개인적인 면모를 접할 수 있었다. 2011년 노 대통령 2주기 추모웹진 ‘Rohmember’에 ‘노무현 대통령의 판사시절 이야기’를 기고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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