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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여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
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서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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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몽) “백말이 말뚝에 매어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발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어머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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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고시를 공부하던 큰
형님의 영향을 받아 고시에의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66년 10월에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
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1975년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6년부터 시작은 했지만 실제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경부터였다. 합격하고
나서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고 그 후 1978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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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예비(자격)시험부터 준비했는데 책 살 돈이 없어 결국 울산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함바’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받은 일당은 180원, 공치는 날이 많아 밥값도 모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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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또 그 기간 중에 믿고 따르던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1968년에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
한 뒤 1971년에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 시절 원주의 사령부에 있다가 전방부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에 고향 마을에서 같이 자라면서 알고 지낸
권양숙씨와 연애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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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갖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도
있습니다. 몇 길로미터나 이어지는 둑길을 걸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늦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는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논길을 걷노라면 벼이삭에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사되어 들판 가득히 은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동화속의 세계같은 그 속을 거닐며
아내는
곧잘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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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부산의 ‘부림’사건이었다. 이는
서울의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
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학생들의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한
학생들의 상처를 보았고 외면하지 못했다. 이후 시국사건, 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하
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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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살아야겠다.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요트반 학생들과 요트를 타던 것도 아예
그만 두었고, 잘 나가던 조세전문가의 길도 접게 되었죠. 그때 얻은 별명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인권변
호사 ‘노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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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
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렸고 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지하다시피
하고 운동
에 전념하여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행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해 9월 대우조선의 이석규 씨가 파업중 거리시위를
나왔다
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사망한 일이 발생하자, 임금협상과 보상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측의
편에서 상담을
해주었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3일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의 개업
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에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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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시절)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님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원하다가 운동가가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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