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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님 신상 털기(?)

돌솥note 조회 591추천 142012.02.19



 

1. 출생의 비밀

하마터면 못 태어날 뻔 했습니다.
어머니가 임신 초기엔 ‘지우려고’ 하셨답니다.
아이 넷 키우기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요.
독실한 신앙인인 아버지의 반대 덕에, 구사일생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양력으로 1964년 7월 4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구로동 연희동 잠실 등에서 자랐습니다.
(중랑은 외국어대 다닐 때 중랑교를 건너와 술을 마시던 곳이기도 하고, 수배생활 때 숨어 살기도 했던 곳입니다.).
1녀 3남의 막내.
누님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퇴직했고,
큰 형님은 신
학 박사이자 목사,
대기업 증권맨 출신의 작은 형은 뉴질랜드에 이민 가 살
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이제 9순을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2. 가난과 함께 크다

한국전 참전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일찍 퇴직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하셨던 탓에
어릴 때부터 집안이 가난했습니다.
늘 제때 수업료를 못내, 선생님에게 혼나기 일쑤였습니다.
반면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어머니는 당시로선 인텔리였지만,
 남편 잘못 만나 평생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두 분은 그게 한스러워 자식들 교육에 모든 걸 바쳤습니다.

가난이 하도 원망스러워 한때 아버지를 탓하기도 했지만,
가난해도 강직했으며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걸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자식 넷을 모두 대학 교육 시키느라 집안은 항상 빚에 쪼들려야 했고,
나중에 아버지는 건설현장 노가다,
어머니는 보건소 청소 일까지 하며 4남매를 뒷바라지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작은 형과 둘이 밤늦은 시간에
어머니 청소 일을 돕기도 했고,
커서는 아버지 노가다 일을 도와드리러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특히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을 보면,
옛날 어머니 생각이 나 짠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3. 문학소년

안정된 직업을 못 구한 아버지가
서울의 이 곳 저 곳을 전전하는 바람에
어릴 때 전학이 잦았습니다.
학교를 자주 옮기다 보니 친구보다는 책에 빠졌고,
그러면서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매년,
 언론사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했습니다.
치기 어린 일이었지만 그만큼 글이 좋았고,
시인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에도 공부보다는
문학서적과 시, 수필을 쓰는 일이 좋았습니다.
그때 길러진 감수성과 글쓰기 작업이
훗날 여러 모로 좋은 바탕이 된 것 같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4. 세상을 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평생의 은사인 김진경 선생님(교육운동가이자 시인-소설가)을 국어선생님으로 만났습니다.
그 분을 통해 사회과학 서적(이른바 운동권 서적)을 접했고,
세상의 부조리에 눈뜨게 됐습니다.
남들이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이 돼 읽을 책들을
이미 고등학교 때 섭렵하고 어린 운동권이 된 셈입니다.

고 3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현장 노동운동에 뛰어들까 고민까지 했지만,
선생님과 주변의 설득에 마음을 잡기도 했습니다.
가장 방황했던 시기였지만 가장 정의감을 배운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김진경 선생님은 훗날 참여정부 청와대에 교육문화비서관으로 임명돼,
먼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양정철과 조우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5. 대학, 정의를 위해

국문과 진학을 희망했지만,
가난했던 부모님은 ‘밥’이 되는 법대 진학을 종용했고,
결국 4년 내내 법학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대신 글 쓰는 일이 좋아 대학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편집장, 전국대학신문 기자연합 회장까지 하게 됐습니다.
수업은 뒷전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신문은 운동권 조직과 진배없이
현실 운동에 깊숙이 참여했습니다.
전두환 독재가 민주주의를 압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뒤 아예 학생운동 전면에 나서면서 외대 자민투위원장,
서울지역 전 대학 연합투쟁조직인 학투련 부의장을 맡기까지 했습니다.
현상금과 일계급 특진이 걸린
시국사건 주요 현상수배자로 지목돼 오랜 기간을 도망 다니기도 했습니다.

오랜 수배 끝에 검거돼 구속됐지만,
가난 속에서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던 부모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경찰 출신의 보수적인 아버지는
양정철이 검거됐다는 9시 뉴스를 보다가 TV를 부수고 면회 한 번 오지 않았습니다.
화해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6. 사회운동, 그리고 언론운동

출소 후,
 당시 최대 규모 시민단체인 국민운동본부에서 상근 간사로 1년여 일하다,
전국언론노조에 들어가 (미디어오늘 전신인) 미디어 전문지 <언론노보> 기자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전국 언론사 노조의 언론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일과, 언론의 오보 바로잡기,
왜곡된 주요 시국 사건 보도의 진상을 조사해
바로 알리는 일을 전개하면서 언론개혁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후 ‘생활’을 위해 기업으로 옮겼지만
결국 홍보 등 언론과 뗄 수 없는 일을 이어가게 됐습니다.

미디어와 관련해선, 미디어 전문기자를 거쳐,
민간기업 홍보, 국정 홍보(청와대, 총리실 등), 정당과 대선 홍보기획 등을
모두 경험해 본 드문 이력을 갖게 됐습니다.



7. 결혼, 가족

94년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이듬 해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아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입니다.
학교에선 사회를 가르칩니다.

장인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연합뉴스에서 정년퇴직했지만
역시 강직한 분이어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지 못했습니다.
결혼할 당시 양쪽 집 모두 형편이 넉넉지 못해,
젊은 부부는 집안에서 한 푼도 지원 없이
자력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으니,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글출처 - 양정철 팬 카페 (http://cafe.daum.net/yangjungchu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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