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 make error!! /var/www/html/data/world/user_photo/202509/dir make error!! /var/www/html/data/world/user_photo/202509/thumb/
운현궁&궁궐보다 더 큰 권세를 누렸던 집
궁궐은 아니었으나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출생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대 왕이 되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다스리게 되니
이 집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궁’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곳은 점점 그 규모를 늘려가는데
담장의 둘레만도 수 리에 달했다고 하며,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의 왕래를 쉬이 하기 위해
운현궁과 이어지는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입구로 들어서면 이 집을 지키던 사람들이 머물던 수직사가 오른편에 있고
그곳을 지나면 노안당이다.
노안당은 사랑채로, 대원군이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껏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후기 양반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노안당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해서 만들었다 하며,
처마를 이중으로 두르고 있는 보첨도 이 건물의 볼거리이다.
옆으로 이어지는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고종이 명성황후 민씨와 가례를 올린 곳이 바로 여기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안채로 쓰였던 이로당이 있는데,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가 살림을 하던 곳이다.
밖에서 보면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듯 보이나
계단을 올라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가운데 중정이라는 ‘ㅁ’자형의 작은 마당이 마루로 둘러싸여 있는데
안채가 가지는 성격에 따른 폐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구조라 할 수 있겠다.
이로당을 나서면 앞으로 작은 기념관이 있어 흥선대원군이 주장했던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등을 모형으로 볼 수 있다.
네이버(펌)
![]() |
![]() |
![]() |
![]() |
---|---|---|---|
10415 | 아유~~~ 꿈도 야무지셔요. (4) | 돌솥 | 2012.02.20 |
10414 | 文風은 태풍이다!!! (2) - 이창동 감독과 함께 (11) | 돌솥 | 2012.02.20 |
10413 | 봉하에 저녁노을속으로 (5) | 요정새우 | 2012.02.20 |
10412 | 2012년2월19일 청계산(산따라 동호회) (5) | 묵사발 | 2012.02.20 |
10411 | “일 ‘독도 일본땅 표기’에 MB ‘기다려달라’고 했다” (5) | 돌솥 | 2012.02.20 |
10410 | 김경수 이야기 (1) (7) | 돌솥 | 2012.02.20 |
10409 | 남산골 한옥마을 (8) | 미트로 | 2012.02.19 |
10408 | 양비님 신상 털기(?) (8) | 돌솥 | 2012.02.19 |
10407 | 푸.동.대.지 (푸대접받는 동전과 대우받고싶은 지폐) 구출작전 (9) | 보미니성우 | 2012.02.19 |
10406 | 세때와 춤을 (4) | 나모버드 | 2012.02.19 |
10405 | 다 도망 갔는데 혼자 남은 사람이 있어..그사람이 누군지 알아 ?~ .. (19) | 내마음 | 2012.02.19 |
10404 | 삼천포항 & 시장 (15) | 고향역 | 2012.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