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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참...

수월note 조회 1,641추천 152009.03.11

때는 2월 26일 이었다.
전날 대구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아침에 농장으로 들어서는 이 인사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엄마 나 군데 간다"
"언제?"
"3월 2일 날"
 
앗 뜨거라.
엿 들은 내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5일이라.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를 않은가?  
딴에는 하고 싶고 보고 싶은 일들이 마음속에 있을 것인데.
그 속이 얼마나 탈것인가?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안 드는 것은 아니었다.
군대라는 감옥을 가고 싶은 인사들이 어디 있겠는가?
입대 날짜가 정해지면 그때부터 가야한다는 암울한 생각들이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고...
그 고통이 어떠할 것인가?
 
"수인아 차라리 잘 됐다. 빨리 들어가야 제자리를 잡을 것이니..."
나는 이런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내 조카인 강병희 군이 8개월 전 입대를 할 때 나는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남자가 군대를 무서워하면 되나. 그까짓 것 뭐라고"
 
애 군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그때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특히 수인이 놈이 학교 다니느라 떨어져 살다보니 무덤덤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과 군대라는 차이를 느끼기 시작을 하고부터 나는 이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는 심각한 함정에 빠지는 것이었다.
 
처음의 발단은 이렇게 왔다.
 
저 놈이 얼마나 가기가 싫을까?
군대라는 것을 생각만 해도 큰 납덩이 하나가 가슴을 사정없이 짓누를 것인데...
내 속이 이렇게 무거운데 지 놈은 어떠할까?
얼굴만 쳐다봐도 나는 가슴이 아리는 것이었다.
 
5일 후에 입대하라는 문자 메세지를 받고는 더욱 애 얼굴 보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측은함으로 밀려오는 가슴앓이가 나는 견디기가 무척 힘이 드는 것이 현실인 것이고...
 
"수인아 바래다 줄 친구들 없겠나?"
과연 나는 훈련소 정문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설 때 눈물을 안 흘릴 자신이 있겠는가가 앞으로 닥친 과제였다.
꾀를 낸 것이 위의 멘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였고 꼼짝없이 나는 그 악몽의 배웅 길을 나서야만 하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입대 전 날.

"친구들 불러 저녁 한 그릇 사줄까?"

휴가 나온 인사가 3명이었다.









야로 - 거창 - 안의 - 장수 - 진안 - 전주 - 논산으로 가는 길.
초면의 길이라 넉넉히 아침 9시에 출발을 했다.

전 날.
"수인아 뭐 먹고 싶은 것 없나?"
"국밥 먹고 싶다"
새벽까지 친구들과 어울렸을 인사나 가슴이 아린 인사나 밥알이 입 안에서 멤 돌 뿐 목넘이가 영 시원찮은 것이었다.  
 
국밥집 아주머니가 서두르는 내 모습을 보고는 당황을 하시며.
"와 어데 먼데 가요?'
"예"
자식 놈 군데 바래다주러 간다는 말이 목구멍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도착하니 두 시간 가량의 여유가 있었다.
이 막막한 시간을 어찌 할 것인가?
 
훈련소 안에서 이발을 해도 되겠지만 첫 날의 그 경황없는 중에 따로 불려가서 바리깡으로 밀어제칠 상황을 생각하니 그 또한 더 안스러울 것 같아 이발부터 시켰다.
나는 또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어려워 밖에서 멤을 돌고...
 
신발 깔창 시계 무릎 보호대 양말(보급품으로는 모자란다고 겁을 주고) 대일 밴드 이러한 것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수 십 명은 될 것 같았다.
 
"무릎 보호대 이거를 차야 빡빡 길 수 있어요"
어떤 쉬불헐 아줌니는 요렇게 약을 올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한 그것들이 싫어 남은 시간을 허비할 곳을 찾다 견훤 왕릉으로 향했다.
사진 찍히기를 싫어하는 저 인사도 마지막 순간이 오고 있다는 생각에 순순히 응해줬다.
그것을 보는 내 가슴은 또 먹먹해지고...
망할노무 시간은 더디기만 할 뿐이고.




사진에서 눈물은 안 보이제? ㅜ.ㅜ...




마지막에서 가장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것은.
저노무 전화기였다.
단 시간에 수 십 통의 전화질을 하는 것 같았는데...
모두들에게 이별 식을 여는 것이었다.
잠시 후면 모든 것들과 단절을 해야만 하는 그야말로 아쉽고 초조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들어가면 전화기를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저노무 전화기를 내 손에 넘겨주는 순간 저 인사의 자유도 박탈이 되는 것이고.
부모들도 연병장에서 자식들에게 경례를 받는 행사가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받을 자신이 없었다.
 
"아빠는 정문에서 니 내려주고 바로 가야겠다. 농장에 할 일이 많다"
 
새빨간 거짓말로 나는 눈물의 현장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었다.
전화질은 마지막 순간 까지도 귀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전화기를 뺏을 자신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인연들과 만나라며.
"고마 전화기 가지고 들어가라. 그것 때문에 그렇게 혼나지는 않을 것이다. "
 
차를 재빨리 돌렸다.
1,200명이 입소를 한다니 차가 밀린 이유도 있겠거니와 혹시 뒤돌아 볼 저노무 인사의 얼굴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운전 실력이 썩 괜찮은 자신이 고마웠다.
냅다 달렸다.
집에 다 다를 때까지 나는 아내에게 무슨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내내 가슴이 뻐근하도록 아리고 먹먹했다.
 
야로에 도착해서는 바로 술을 찾았다.
마침 친구 둘이서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들어서며 나는 이런 멘트를 날렸다.
"ㄸㅂ... 자식 군대 보내는 그것 할 짓이 아니더라"
일찍 보내 제대를 시킨 친구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제..."
아직 고등학생을 둔 친구는.
"등신 같이 그기 뭐라꼬..."
하긴 나도 그렇게 쉽게 생각을 했으니까.
 
입고 갔던 옷과 주소와 편지가 같이 왔다.
궁금해 할 친구들에게 주소라도 알려 준다며 싸이월드를 여니 이 인사는 이러한 멘트를 남겨 놓아 또 한 번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아 잘 지내요.
안녕
2009. 3. 2  00:00

입대 날의 시작 시간인 것이었다.

“아빠 오빠 보내주며 울었나?” 하고 혜린이가 살며시 물어왔다.
“울었을 수도 있었겠지”
흠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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