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 make error!! /var/www/html/data/world/user_photo/202509/dir make error!! /var/www/html/data/world/user_photo/202509/thumb/

home > 사진·영상 > 참여갤러리

참여갤러리여러분들의 사진과 영상을 공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각본 짜여진 "전여옥 사건"

장수아들note 조회 1,067추천 142009.09.09

"'전여옥사건'은 이미 각본 짜여져 있었다"

[인터뷰] 29일 출소한 이정이 부산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 대표

 
“눈을 안찔렀기 때문에 저는 당당했다. 이정도로 수사본부를 차린다는 건 정권이 이 사건을 이용하는 것 밖에 안되는거다. 결국 하나의 각본이 짜여졌다는 것을 느꼈다. 보석을 아무리 신청해도, 적부심 과정에서도 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공안사건이 되어버린 격이다.”

3일 오후 부산지역의 한 병원에서 만난 이정이 전 부산민가협 대표는 석달간의 수감생활로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이른바 ‘전여옥 폭행사건’에 대한 입장만은 분명했다.

특히 이 대표는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민주화운동보상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5.3동의대사건이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 “20년동안 가만있던 사람들이..”라며 일갈했다. 당시 동의대 사태로 숨진 경찰 가족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던 이들이 왜 이제와서 사건을 재점화 시켜 논란을 일으키고 있냐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각본이 짜여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정이 부산민가협 전 대표

이른바 '전여옥 사건'에 연루되어 석달간 영등포구치소에 구속수감됐던 이정이 전 부산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대표가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결국 부산으로 돌아왔다. 몸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이 대표는 주변의 권유로 부산 사하구의 모 병원에 입원한 상황이다.ⓒ 민중의소리

국가인권위로부터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로 추천될 만큼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이정이 대표같은 명망가가 지난 2월 ‘폭행공방’에 휘말려 구속수감되는 일이 벌어졌다. 3개월만에 석방됐지만 20년전의 사건인 5.3동의대사태의 진상규명을 외치며 다시금 과거처럼 국회와 각 정당 등을 찾아다니며 불철주야 움직일 기세다.

<민중의소리>는 전여옥 의원 폭행공방에 연루돼 구속수감된 뒤 3개월만인 지난달 29일 1심선고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이정이 부산민가협 전 대표를 만나 솔직한 심경과 앞으로 계획을 들어봤다.(이정이 전 대표는 부산지역의 시민사회진영의 중요 인사로 6.15공동선언남측위 부산본부, 부산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부산민주항쟁기념사회업회, 부산민주공원 등에서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있기에 앞으로 ‘이정이 대표’로 총칭하기로 한다)

현재 이정이 대표는 출소 이후 부산으로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종합검진을 받기위해 부산 사하구 하단동의 모 병원에 입원한 상황.

기자와 인터뷰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시민사회진영을 비롯 각계각층의 줄방문이 이어져 이 대표가 부산지역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지 새삼 실감케했다. 결국 인터뷰도 이 대표의 건강과 상황을 고려해 1시간 30분여로 줄여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전여옥 사건’은 지난 2월과 3월만해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안이다. 이 사건이 터지면서 정부여당에서 ‘테러’발언이 나올 정도로 정치공세 광풍이 몰아쳤다. 그러자 <동아일보>를 필두로 대부분의 언론들이 ‘전여옥 집단폭행’ 등을 연일 탑기사로 다루며 대대적으로 보도에 열을 올렸다,

이날 이정이 대표는 “한쪽 주장만 듣고 말과 펜으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언론이 그렇게 하는걸 보니 보니 서글프다”라며 언론에 대한 섭섭한 감정부터 드러냈다.

그러나 우연찮게 맞물린 노 전대통령 서거 정국 탓도 있겠지만, 석달이 지난 지금 이정이 대표의 1심선고 결과에 대한 보도는 당시의 취재 열기와는 매우 차이가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사건보도가 얼마나 거품이 많았는지 보여주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충분히 대화 될거라 믿고 전여옥 의원 사무실 찾아갔는데.. 앞서 폭행당해 쓰러져"

이번 인터뷰 과정에서 그동안 전 의원측의 주장에만 묻혀 확인하지 못했던 사건 당시 전후 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월 27일 국회에서 벌어진 ‘공방’ 이외에도 이미 3-40분 전에 전여옥 의원 영등포 사무실 앞에서 또다른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5.3동의대사건 재심의 하자는 움직임이 보이자 기자회견까지 잡혀있어 동의대 사건이 어떤 것인지 전 의원측에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미 문민정부때부터 해결되어온 이야기를 다시 재론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여옥 의원이)이화여대에 KBS기자 출신이어서 충분히 대화가 될 것으로 예상되어 찾아갔다”

이런 이유로 멀리 부산에서 27일 영등포 사무실 앞까지 '민주화보상법 개정반대' 기자회견에 참가한 이정이 대표는 정작 전 의원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알수 없는 남성에게 험한 욕설을 듣고 어깨부분을 폭행당해 실신했다.

이 대표는 “우리 자식들(그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과 청년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건과 노동자 구속사건이 벌어질때 마다 구치소, 교도소, 경찰서부터 청와대, YS가 사는 상도동까지 다 다녔지만 한번도 욕을 듣고 폭행당한 적은 없다. 20년동안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대표는 몸을 추슬러 국회에 도착한 뒤 우연찮게 만난 전여옥 의원과 실랑이가 붙게 된다. 이정이 대표는 “3-40분전 벌어진 사건에 격한 마음이 들어 멱살을 잡고 항의했을 뿐 눈을 찌른 적도 폭행을 공모한 적도 전혀 없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이 대표는 ‘폭행범’도 모자라 ‘집단폭행 공모’, ‘테러범’으로 까지 몰리며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날 이후로 검·경찰은 50여명 규모의 수사본부까지 꾸렸고, 이후 일사천리로 수사가 진행됐다. 사실 단일 폭행사건으로 이렇게 신속하게 대규모 수사본부를 차린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과거 연쇄살인사건 수사도 이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1심재판에서 이정이 대표는 “폭행공모와 폭행혐의 무죄”로 판결났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전여옥 사건’을 공안사건으로 규정했다. 이정이 대표는 “정권이 이 사건을 이용했다"며 "보석이 몇차례 기각되고 구속적부심 과정을 보면서 하나의 각본이 짜여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용산참사 문제를 뒤로 감추고, 5.3동의대 사건을 부각시켜 우연하게 벌어진 사건에 나까지 끌고 들어온 게 아니겠나. 용산참사가 터지자 수습하기 위해 뭔가 어떻게 해보려다 아니나 다를까 동의대 사건을 다시 불거지게 하고 전여옥 사건을 매치를 시켰다. 그러나 결국 경찰도 검찰도 어려워했고, 심지어 검찰 조사도 하루만에 마무리 될 정도였다.

전화통화하는 이정이 대표

이정이 대표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지역의 원로들과 시민사회진영 인사들의 안부전화와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3일 인터뷰 도중에도 걸려온 안부전화를 받고 있는 이정이 부산민가협 전 대표ⓒ 민중의소리



“5.3사건 피해자들은 모두 독재시대가 만들어낸 희생양.. 정치적악용 안돼”

이정이 대표가 이런 수난(?)을 겪게 된 이유는 다름아닌 5.3동의대 사건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것에 대해 다시 재심에 붙여야한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다. 용산참사 이후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경찰관 7명이 학생들에 의해 무참하게 불태워져 처참하게 살해된 극악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5.3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에 대한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사건의 재심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대표는 “당시 사태가 벌어질때 화재보다 추락사한 사람이 더 많다”며 “사건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전 의원발언을 일축했다. 이어 수사당국에 대해서는 “용산참사 문제를 뒤로 감추기 위해 5.3동의대 사건을 부각시키고 우연하게 벌어진 사건에 나까지 끌고 들어왔다”고 분통을 감추지 않았다.

이정이 대표는 “5.3사건의 피해자들과 학생들은 모두 독재시대가 만들어낸 희생양”이라며 “이미 명예회복까지 된 마당에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없이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20년만에 일부 국회의원과 경찰총장이 현충원을 방문하는 등의 모습에 대해서도 “그동안 경찰 유가족들이 힘들어할때는 뭐했나”며 “이런 비극적인 일에 진정 도움을 주기는 정치적으로 악용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이정이 대표는 동의대 사건이후에도 매년 명절이면 음식을 싸들고 찾아가고 경제적 문제도 해결하는데 나서는 등 당시 사고로 숨진 최동문 경위를 비롯한 경찰 유가족들을 챙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2002년, 유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을 방관(?)하는 경찰에 분노해 송기인 신부와 함께 부산경찰청장을 찾아가 모금운동을 하게 한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또 이정이 대표는 알려진데로 5.3동의대사건으로 구속됐던 아들을 두고 있다. 당시 모 과학생회 홍보부장이었던 아들이 구속되자 총학생회장 가족들보다 더 열심히 나서서 사건의 진상규명과 문제해결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런 까닭에 5.3동의대사건과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 어디든 달려갔다.

동의대 사건이 터진 이후 당시 만나기 어렵다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직접 찾아가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한 점이나 2002년 동의대 사건 관련자 46명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자 <조선일보>가 문제제기를 하자 수차례 항의 끝에 정정보도를 하게한 부분은 그가 문제해결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움직였는지를 엿보여 준다.

지난 3월 부산에서 열린 이정이 대표 석방 연대의 밤에 아이들이 나와 "대장할머니를 풀어달라"며 외치고 있다

지난 3월 부산에서 열린 이정이 대표 석방 연대의 밤에 아이들이 나와 "대장할머니를 풀어달라"며 외치고 있다ⓒ 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배안아프고 낳은 수많은 자식들이 이정이 대표를 부르는 이름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후 이정이 대표는 5.3동의대 사건의 진상규명 등에 앞장서며 전국적으로 ‘어머님’으로 불리우게 된다. 교도소, 구치소, 각종 집회현장 등을 찾아다니며 ‘우리 자식들’을 석방시키거나 인권상황을 바꿔내기 위해 20년동안 한번도 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일까? 지난 3월 열린 ‘이정이 대표 석방의 밤’에는 수백명의 부산지역 원로들과 인사들이 몰렸다. 그날 제목도 '어머니! 우리어머니'다.그의 말대로 배안아프고 낳은 수많은 자식들이 이 대표를 '어머니'로 부르고 있다.

“부끄럽지만 어디를 가나 ‘어머님’으로 통칭되더라. 미국과 유럽, 심지어 북측에 가서도 어머님으로 불리운다. 배도 안아프고 너무 많은 자식을 얻었다. 자식 부자다. 그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활동해온 것을 좋게 봐주셔서 그런것이라고 생각한다.”

약간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하던 이 대표의 모습에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로 추천된 이유가 충분히 이해될법 했다. 인터뷰를 통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 대표는 ‘전여옥 사건’으로 구속수감 동안에도 구치소내 인권운동을 벌였다. 민가협 어머니답게 어디를 가나 민주화 투사다.

이 대표는 주말께 퇴원해 앞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보상법 개정안 처리 저지에 모든 힘을 쏟겠다는 입장이다. 주변에서는 건강을 걱정해 휴식을 더 취해야한다고 권유가 아닌 부탁까지 하지만 내년이면 칠순이 되는 이정이 대표에게 한순간도 쉽게 보낼 수 없다.

"민주화운동법 개정안 처리가 6월 중에 진행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과거사위원회의 진상규명 요청도 재차 확인할 계획이다. 청와대에도 박형준 비서관을 통해 25장에 걸쳐 편지를 보냈다. 공권력은 또다른 공권력을 낳는다. 용산참사도 되풀이 하지말라고 썼다.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을 죄다 만날 생각이다."

인터뷰 말미 이번 사건의 상대방 당사자였던 전여옥 의원에게 한마디를 부탁하자 그는 “독설보다는 사랑부터 주는 것을 더 배웠으면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행안부가 이정이 대표를 대한민국 인권상 심사대상에서 제외시키자 부산지역 인권진영은 이 대표에게 3회 부산인권상 특별공로상을 수여했다

행안부가 이정이 대표를 대한민국 인권상 심사대상에서 제외시키자 부산지역 인권진영은 이 대표에게 3회 부산인권상 특별공로상을 수여했다ⓒ 민중의소리

이전 글 다음 글 추천 목록
592 page처음 페이지 591 592 593 594 595 596 597 598 599 600 마지막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