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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일시론 (노대통령님의 비망록 ) 기사펌 ~!!박경철 <시골의사>
비단장시
조회 2,153추천 302009.10.13
'검찰이 미리 그림을 그려놓고 없는 사실을 만들거나 억지로 끼워맞추려 해선 안 된다. 그동안 수사팀은 너무 많은 사실과 범죄의 그림을 발표하거나 누설했다. 검찰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불법행위다. 검찰은 끝내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건이라도 만들어 낼 것이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상실했다. 권위도 신뢰도 더 이상 지켜야 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사실대로, 법리대로만 하자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것은 검찰의 공명심과 승부욕이다.' 이번에 공개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망록'에 실린 글이다.
두려운 것은 검찰의 공명심과 승부욕
지금 이 시점에서 사건의 진실은 중요치 않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밝히려고 해도 이제는 밝힐 수 없다. 더구나 지금와서 다시 진실을 따지는 것은 무망한 일일 수도 있다. 개미가 태산을 인식할 수 없듯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당대의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지 않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이 시점에서 누군가가 섣불리 이 일을 다시 거론하거나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무망할 수는 있지만 그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이제 시계를 돌려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비망록'에도 나와 있듯이 박연차씨의 돈을 권양숙 여사가 수령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거액이 오고 간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남편인 노 전 대통령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계적인 발상이다. 물론 이치상 그럴 수는 있다. 마땅히 의심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아내가 한 일'이라고 말했다면 노 전대통령은 그 사실을 몰랐다고 보는 것이 옳다. 상식과 합리는 늘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식의 범주에서는 '마땅히 있을 수 있는 일'도 합리의 영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상식'은 '진리'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신의 영역일 뿐 인간의 몫이 아니다.
여기에서 '상식'이 아닌 '합리'를 한 번 불러내 보자. 합리는 어떤 사실을 두고 진실과 거짓이라고 규정하는 이분법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기댄 판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아버지이고 남편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한 일을 아내나 자식에게 미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족이 한 일을 자신이 한 일이라고 하는 아버지는 있어도 자신이 한 잘못을 두고 식구가 한 일이라고 미루는 아버지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합리다.
법률가의 상식으로는 몰랐을 리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아내가 한 일'이라고 말하는 남편, 혹은 아버지의 말은 믿어주는 것이 합리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합리'가 아니라면 그것을 가리켜 '패륜'이라고 한다. 만약 검찰의 주장대로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아내가 한 일'이라고 말했음에도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그가 '패륜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 점에서 오히려 아내의 허물을 대신 뒤집어 쓸 수 없었던, 전직 대통령의 비애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있지 않았다면, 또 그로 인한 국민의 실망을 의식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내가 한 일' 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간단히 이해될 일이다.
합리가 아니면 패륜이었을 행위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설령 노 전 대통령이 정말 '스스로 한 일'을 '아내가 한 일'이라고 미룬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정말 그랬다면 노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이기 이전에 이미 아버지로서 자격미달이 된다. 그 경우 그런 아버지를 5년 동안이나 국가원수로 인정했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너무 절망적이고 불행해진다.
다시 말해 설령 수사팀이 정말 그렇게 믿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국민을 생각해서 그것을 굳이 파헤치려 들 필요가 없었던 일이 아니었겠는가 싶은 것이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국격(國格)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는 뜻이다.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비망록을 읽으면서 바로 그 점이 안타깝다. 그것도 신임총리가 수중에 단돈 29만원밖에 없다는 전직 대통령을 예방했다는 소식까지 같이 들리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