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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님을 다시 돌아 봅니다.

내사랑note 조회 1,521추천 372009.12.05


 

한명숙 님 블로그 : http://www.hanms.net/

(블로그에 가셔서 격려의 글을 남깁시다.)

 위키피디아  :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B%AA%85%EC%88%99

 

 


순진한 새댁 한명숙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랑은 달콤하며 아름답다.
하지만 사랑의 상실은 달콤함에 비견할 수 없는 큰 아픔과 상처를 준다.
한명숙의원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니를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킨 사람은 남편 박성준교수이다.
한명숙의원은 남편에 의해 변화된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 그로 인해 내 인생은 평범한 삶에서 고난에 찬 삶으로,
문학소녀에서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변해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변모시킨 키다리 아저씨.
그가 바로 내 남편 박성준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한명숙의원의 표현처럼 “4년간의 길고 짙은 연애”였다.
한명숙의원은 학교 동아리에서 운명처럼 만난 젊은 시절의 남편을 이렇게 회고했다.

“ 패기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어요. 무엇보다도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그 이의 명석함과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이었습니다 ”

1967년 12월, 두 사람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는 서약과 함께 결혼식을 올린다.
그야말로 꿈과 같은 신혼생활이었다.
두 사람은 짧고 아름다웠던 신혼 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명숙 전 총리의 결혼식 사진, 신혼의 단꿈을 6개월을 넘지 못했다.
박성준 교수가 구속되어 그들의 신혼은 13년 뒤에 이어졌다.

박성준 교수.
"결혼식 때 처음으로 양복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양장을 두벌 해주었지요.
 가진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습니다.”


한명숙 의원
“가난했지만 전 남편을 믿었습니다.
(박교수에게) 우리 부부가 신혼 첫날 밤 무얼했는지 기억하세요? ”

박성준 교수
“축의금을 세는 일이었지요”


신혼 첫날밤 축의금을 셀 정도로 가난했던 신혼부부.
 비록 좁은 단칸방 오막살이였지만 둘은 앞날의 희망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수입은 박성준교수가 과외교사를 통해 벌어들인 푼돈이 전부였다.
쌀이 떨어진 적이 많았다고 한명숙의원은 회고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친구들이 단칸방에 들이닥쳐
밤을 새워 술 추렴을 할 때가 많았단다.  

끼니를 걱정할 만큼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박성준교수는 책사기를 즐겨해
마음 여린 새댁을 애태우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좁은 방에 어울리지 않게도 고급 마호가니 전축을 들여 놓고
클래식 음악을 들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심지어 감옥에 간 이후 편지에서도 박성준 교수는
그 전축만은 팔아먹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꿈과 낭만을 먹고 사는 젊은 부부.
하지만 이토록 애틋한 신혼의 꿈은 6개월 만에 깨져버리고 만다.
구둣발로 한 밤중 들이 닥친 형사들에게 두 사람은 연행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독재 권력에 빼앗겨야만 했던 한명숙의원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이제 혼자다. 운동의 동지이자, 삶의 친구였으며 사랑하는 애인이었던
내 님은 가고 나만 혼자 남았다. 지구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렇게 좁아만 보였던 신혼방은 시베리아 벌판 보다 더 황량하고 추웠다.
 슬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난 그 때 사람의 눈물이 마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직 세상의 물정과 삶의 치열함에 대해 여전히 숙맥이었던
 한명숙의원은 여전히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한명숙의원이 남편에게 보낸 옥중서신에 그가 얼마나 연약한 심성을 가진
철모르는 새댁이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69년 남편에게 보낸 편지이다.


준이 보세요.

우선 편지 쓰게 된 기쁨부터 전해드립니다.

저는 요사이 서로 만나 웃을 수 있는 귀한 *오 분(五分)을 소유할 수 있는 우리의 생활이 어쩔 수없이 단축되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파 오늘부터 느닷없이 편지 쓰기로 마음먹었답니다. 앞으로 우리의 이 편지가 서로의 생활에 기름을 칠 수 있는 훌륭한 글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꼬옥 보관하겠어요. 훗날 다시 만날 때 귀한 추억의 자료가 되겠지요.

.....중략....

준, 제가 요즘 *쟝크리스토브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아시죠? 저는 그 책을 읽게 된 것을 무던한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준이를 쟝크리스토브라고 생각해 볼 때가 있어요.
 
오 분 - 당시는 면회시간이 5분이었다.
장 크리스토프 - 로맹 롤랑의 소설, 역경에도 기가 꺾이지 않고 인간 완성을
목표로 하여 악전고투하는 일종의 영혼의 생성사(生成史)를 그린 교양소설.

감옥에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믿기 어려운 밝은 글이였다. 
감옥에 있는 남편에 대해 애써 밝음을 보이려는 배려도 있었겠지만
마치 어려움 삶 자체를 즐기는 듯한 낭만적이고 소녀 같은 감수성이
편지 곳곳에 드러난다. 젊은새댁은 남편의 감옥생활이 그리 길지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금방 풀려 나리라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진한
낙관은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말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명숙 인터뷰 모음 "한명숙을 만나다"

2009/11/09 20:47
Q.사랑은 관심이다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사람들이 사랑 그러면 생활을 좀 떠나서 감정의 영역에서 무슨 필이 꽂히는 거, 이런 걸 좀 생각하기 쉬워요. (...) 저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살다보니까 생활 전반에서 배려와 관심 그리고 함께 해결해 나가는 그런 프로세스, 과정 이런 것이 진짜 사랑하고 연결이 될 때 그것이 오래가고 지속적이고 진짜 사랑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전문보기)


Q.그녀는 그렇게 노무현상실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보면 안다.
저는 그 어마어마한 일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역할이다 보니까, 그때는 절대 울지를 못했어요. 꼬마도 오고 할아버지도 오고 농민도 오고 별별 사람들 다 오잖아요. 그 사람들 마음, 표정, 울부짖음이 전부 다 전달이 되요. 거기 30분쯤 서 있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질질 울고 다니면 어떻게 중심을 잡겠어요. 그래서 가슴으로만 우는 거예요. 의연하게 하려고 했어요. 담담하게 했어요. (전문보기)


Q.어떻게든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녀의 권력의지를.
‘반드시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저는 이제 만들어 나가고, 조정하고, 진보세력이 뿌리를 내려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 나가게 할 역할은, ‘내가 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정치인은 다 ‘내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저는 그런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뭐가 되려고 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보는 거죠. (전문보기)


Q.노 전 대통령이 인간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나 그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정책을 편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죄송하다. 역부족이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실제 국정을 운영해보면, 한국의 경제적 지위를 수치상으로 상승시키지 않고 가시적으로 후퇴시킨다면 권력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상황이 온다. 당장 경제 성장을 중시하는 현 구도 아래서는 농업에 대한 중시는 국정운영 내에서 전혀 존재할 수가 없다. 안타깝다.(...)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일색으로 가다가는 망한다는 자성을 하고 있지만, 그런 전환은 단시일 내에 쉽지 않을 것이다.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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