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아흔, 세상 떠날날이 머지 않았지… "
올해 아흔인 홍영녀 할머니는 매일 일기를 쓴다 학교 문턱을 밟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일흔이 돼서야 손주에게 한글을 배웠다 까막눈에서 벗어난 이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홍 할머니는 삐뚤빼뚤 서툰 글씨에 맞춤법조차 엉망이지만 20여년 동안 써 온 그의 일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 세상과 이별할 날이 머지않은 그의 일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인지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물끄러미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홍 할머니 추수가 끝나면 홍 할머니는 씨앗 봉투마다 이름을 적어 놓는다
몇 년째 이 일을 반복하는 그는 혹여 내년에 자신이 심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식들이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손수 지은 농작물을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홍 할머니가 1994년 8월 18일에 쓴 일기 전문이다
'내 글은 남들이 읽으려면 말을 만들어 가며 읽어야 한다 공부를 못해서 아무 방식도 모르고 허방지방 순서도 없이 글귀가 엉망이다
내 가슴 속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꽉 찼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연필을 들면 가슴이 답답하다 말은 철철 넘치는데 연필 끝은 나가지지 않는다
! 글씨 한 자 한 자를 꿰맞춰 쓰려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모른다
그때마다 자식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 놓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글 모르는 게 내가 국민학교 문턱에라도 가 봤으면 글 쓰는 방식이라도 알았으련만 아주 일자무식이니 말이다 엉터리로라도 쓰는 것은 아이(손주)들 학교 다닐 때 어깨 너머로 몇 자 익힌 덕분이다
자식들이나 동생들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도 못했다 숫자는 더 깜깜이었으니까 70이 가까워서야 손자 놈 인성이 한테 숫자 쓰는 걸 배웠다
밤늦도록 공책에 써 보았고 내 힘으로 딸네 집에 전화 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숫자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건 전화로 통화를 하고 나니 장원급제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너무 신기해서 동생네도 걸고 자식들한테도 자주 전화를 했다
나는 텔레비젼을 보며 메모도 가끔 한다 딸들이 가끔 메모한 것을 보며 저희들끼리 죽어라 웃어댄다 멸치는‘메룻찌’로, 고등어는‘고동아’로 오만원은‘오마넌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딸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약속 장소를 불러 주는 걸 적었는데 동대문에 있는 이스턴 호텔을 '이슬똘 오떼로' 라고 적어서 딸이 한 동안 연구를 해야 했다
딸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하면서 웃는다 그러나 딸들이 웃는 것은 이 ! 에미를 흉보는 게 아니란 걸 잘 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써 놓은 글들이 부끄럽다 그래서 이 구석 저 구석 써놓은 글들을 숨겨 놓는다 이만큼이라도 쓰게 된 게 다행이다
이젠 손주들이 보는 글씨 큰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다 인어 공주도 읽었고, 자크의 콩나무도 읽었다
세상에 태어나 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른다
이렇게나마 쓰게 되니까 잠 안 오는 밤에 끄적끄적 몇 마디나마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말벗이 없어도 공책에다 내 생각을 옮기니 너무 좋다
자식을 낳으면 굶더라도 공부만은 꼭 시킬 일이다 '
가슴에 묻은 자식 생각에 눈물짓는 홍 할머니 어린 자식이 숨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젊은 시절의 아픈 기억과 살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노년의 외로움이 절절이 담긴 그의 일기는 그만의 일기가 아니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꾸역꾸역 참고 살아온 한 여인의 일기요 우리네 어머니의 일기이며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기다 <출처: 비공개 카페> *Y-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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