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 make error!! /var/www/html/data/world/user_photo/202510/dir make error!! /var/www/html/data/world/user_photo/202510/thumb/

home > 사진·영상 > 참여갤러리

참여갤러리여러분들의 사진과 영상을 공유 할 수 있습니다.

2012년11월7일&사람사는세상&도심올레&운현궁...

샹그릴라1225note 조회 882추천 12012.11.07

 

 

 

 

 

운현궁&궁궐보다 더 큰 권세를 누렸던 집

궁궐은 아니었으나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누렸던 집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출생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대 왕이 되는데 그때 나이가 12세였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이 조선을 다스리게 되니

이 집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궁’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곳은 점점 그 규모를 늘려가는데

담장의 둘레만도 수 리에 달했다고 하며,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의 왕래를 쉬이 하기 위해

운현궁과 이어지는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입구로 들어서면 이 집을 지키던 사람들이 머물던 수직사가 오른편에 있고

그곳을 지나면 노안당이다.

노안당은 사랑채로, 대원군이 머물렀던 곳이다.

지금껏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후기 양반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노안당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해서 만들었다 하며,

처마를 이중으로 두르고 있는 보첨도 이 건물의 볼거리이다.

옆으로 이어지는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고종이 명성황후 민씨와 가례를 올린 곳이 바로 여기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안채로 쓰였던 이로당이 있는데,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가 살림을 하던 곳이다.

밖에서 보면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듯 보이나

계단을 올라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가운데 중정이라는 ‘ㅁ’자형의 작은 마당이 마루로 둘러싸여 있는데

안채가 가지는 성격에 따른 폐쇄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구조라 할 수 있겠다.

이로당을 나서면 앞으로 작은 기념관이 있어 흥선대원군이 주장했던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등을 모형으로 볼 수 있다.

네이버(펌)

이전 글 다음 글 추천 목록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0895 봉하가는 길 -1 (9) 소금눈물 2012.05.21
10894 2012-05-20-부산추모문화제 (부산대학교) (11) 나모버드 2012.05.21
10893 서울광장 추모문화제 사진 몇장이예요 (13) 이성수 2012.05.21
10892 많이 더우시겠어요. (2) 봉하민주주의 2012.05.21
10891 봉하에 다녀왔습니다. (5) 소금눈물 2012.05.20
10890 노무현이 꿈꾼 나라 (4) 우진아범 2012.05.20
10889 중딩들의 국토순례 "봉하가는 길" (2) 이바람 2012.05.20
10888 3주기 뭔가 많이 허탈한 ~ 노짱정신 2012.05.20
10887 [蒼霞哀歌 165] 80쌍의 손에서 봉하마을을 읽다 (4) 파란노을 2012.05.19
10886 [蒼霞哀歌 165]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 (2) 파란노을 2012.05.19
10885 2012.05.19 5월은 푸르고 그분도 점점 가까이 오시고 (1) 보미니성우 2012.05.19
10884 사진속의 사진2 (3) 노란하늘 2012.05.18
52 page처음 페이지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마지막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