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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울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리게 만든 세 명의 여자......
돌솥
조회 2,118추천 602010.02.21




탁월하셨던 두 총리님
내 첫사랑은 대학2학년 때 찾아왔다.
서클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그녀,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기에 둘만 따로 만나기 시작했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게 부끄러워 동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곤 하였다.
하지만 그런 만남조차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유신정권에 저항해 학생운동을 하던 내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는 쫓겨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징역을 살게 되었다.
전화위복이라던가,
처음 겪게 된 옥살이로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심할 때,
나의 어디가 좋아서 그런 결심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나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그 때문에 1년뒤 출소를 하고는 본격적으로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고, 삶이 흡족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계속해서 데모대의 선봉에 섰던 나는 급기야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고,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그녀는 인간 이해찬에게는 애정이 있었지만,
학생 운동에 빠져 사는 나의 모습에는 불안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전해왔다.
나는 재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상태였고
번역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그녀에게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었다.
뒤돌아서는 그녀를 보내며 함께 한 행복만큼이나 큰 아픔을 느꼈다.
도저히 잊을 수 없어 몇 번인가 전화를 걸었지만 쌀쌀한 목소리만 돌아왔고,
그때마다 절망에 몸부림치며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그녀를 잊을 만했다.
그러나 운명이란 것이 참 묘하다.
그럴 즈음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연락이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온 것이다.
그녀도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래야 될 것만 같았다고 한다.
비록 나에게 이별을 말하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도 내가 깊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이다.
아내와의 결혼도 힘들었다.
연애시절에 아내의 옷차림이나 행동이 소박하기 그지없어 몰랐었는데
처갓집은 부산에서 건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유지 축에 드는 집안이었다.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나에게 딸을 줄 수 없다며
처가 식구들은 한사코 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혼한 다음에는 데모를 안 하겠다’
라는 약속만이라도 하라는 장인에게 그런 약속은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빈 말이라도 “예”라는 대답을 원하시는 어른께
곧이곧대로 안 된다고 했으니 장인께서 무척 서운해 하셨다.
그러나 결국 마음 좋은 장인은 경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며 결혼을 수락해 주셨다.
신혼생활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내 생활이란게 수배와 투옥의 연속이었으니 아내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6개월 된 딸아이의 재롱을 뒤로하고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교도소에 들어가
그 아이가 4살이 됐을 때서야 나왔다.
81년 안동교도소에 있을 적이었다.
내생일이라고 어머니, 아내, 딸이 음식을 바리바리 해 가지고 면회를 왔다.
면회 마치고 되돌아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내 옷과 책 보따리를 양손에 들고 가는 아내,
손녀를 업고 가는 어머니...이렇게 나를 둘러싼 3대의 여자가
나 때문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울컥하고 눈물이 나왔다.
그날 나는 평생 울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아내에게
“출옥하면 당신과 여행하며 여유있는 삶을 살겠다‘
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 얘기만 한 것 같아 쑥스럽긴 하지만
내 인생에 사랑을 느낀 상대라고는 그녀 하나뿐이니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