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인혁당 무죄!" 누가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인민혁명당사건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사형을 당한 여덟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 조작된 사실에 근거했다는 사법적 확인입니다.
우리 현대사가 그토록 참혹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범죄를 바로잡는 드문 사례를 이제 보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갓 스물을 넘긴 때였으니 옛날이라하기는 어려운 과거입니다. '다시 이런 일이 없어야 할텐데...' 라고 생각하는 마음 속이 그리 개운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여전히 비이성적인듯 보이는 때문입니다 국가보안과는 다른 차원에서라면 여전히 진실을 억압하고 힘을 남용해서 개인과 약자의 권리에 재갈을 물리고 포승 묶는 일이 횡행합니다.
인혁당 유족들을 위해 작은 판화 한 장 새긴 인연으로 오늘 신속한 무죄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살아있어야 할 생명들은 '무죄' 소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귀의 존재지요 무서운 일입니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판화가 이철수 드림.
1975년 4월9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8명에 대해 사형 확정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 재심 기회를 원천 박탈해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로부터 `사법사상 암흑의 날' 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던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 시절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법원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솔직히 인정하고 피고인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정권 안보 차원에서 희생양이 필요하면 정보기관이 희생자를 선별해 고문과 조작을 통해 허위진술을 받아내고 검찰은 정보기관의 입맛에 따라 기소, 법원 역시 정권의 요구에 부응하는 판결을 내렸던 `전근대적 형사사법 절차'의 오류를 인정한 셈이다.
재판부는 숨진 피고인 8명에게 적용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ㆍ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심 사유가 아닌 사안을 제외한 모든 판단 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유신정권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2007년 1월 23일 연합뉴스에서

존경하는 선생님들 제가 드리는 이 이야기가 거짓말로 들리실줄 압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한마디도 거짓말일 수가 없습니다. 저 무서운 중앙정보부를 의식하면서,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면서 쓰는 이 글이 어떻게 진실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하재완 피고인(사형)은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할 때 무조건 아는 사람 20명만 대라고, 너무도 심한 고문을 하여 탈장이 되고 항문이 빠지고 귀가 먹어 견딜 수 없어 아무 이름이나 생각나는 대로 말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전부 법정에 끌려와 인혁당의 조직원이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가공할 일입니까. 하재완 피고인은 검찰에 넘어와서까지 전창일이 지하실에서 전기고문 당하는 것을 보았고 자기가 전기고문 당하는 것을 전창일이 보았다고 법정에서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전창일(무기징역) 변론 맡은 김종길 변호사도 법정에서 전창일이 공산주의자라면 변호사직을 내놓아도 좋다고 하였으며 끝까지 무죄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우홍선(사형) 피고인은 전기고문을 받을 때 전기고문하는 기계를 돌리는 취조관이 술에 취하여서 돌리더랍니다. 한번만 더 돌리면 심장이 파열하여 죽을 것만 같아 유리창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고 법정에서 진술하였습니다.
이 많은 진술이 공판기록에는 한마디도 적혀있지 않고 이사람들에게 불리한 이야기만 적당히 조작, 나열해 놓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남편들이 인혁당원이라는 간첩의 누명을 쓰게 된 아내들과 자식들은 곳곳에서 말할 수 없는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간첩 자식이라고 놀림을 당하며 몰매를 맞아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네에서 꼬마들은 네살먹은 아이에게 간첩자식이라고 나무에다 새끼줄로 꽁꽁묶고 총살하는 장난을 하였으며 아이 목에다 새끼줄로 묶어 끌고 다니면서 간첩잡았다고 소리치며 좋다고 날뛰는 광경을 그 어머니가 목격하였을 때 그 심정이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어떤 아내는 남편이 간첩이라고 다니던 대학직장에서 사표를 요구당하였으며 자식들을 데리고 먹고 살 수가 없어서 공사판에 가서 노동자들 상대로 밥장사를 하는데까지 정보원이 쫓아와서 현장소장에게 압력을 넣어 소장이 밥장사를 못하게 하였으며 옷감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이집 저집 문전으로 드나들면 먹고 살려고 하면 옷감 사주는 사람에게 공갈 협박을 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시골에서 국민학교 선생으로 있던 어떤 아내는 학교에서 당하는 그 수모와 동네에서 간첩의 아내가 선생노릇 한다는 그 압박 때문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서울에 올라와 모 빌딩에서 청소부 노릇을 하면서 아이들 셋을 가르치며 근근히 살아가는 그 원한과 아픔을 죄없는 남편에게 돌리는 어리석은 아내가 되어 남편의 면회가 허락된지 3년 동안 면회를 가지 않아 남편은 감옥에서 울고 아내는 밖에서 울부짖는 비극을 과연 누가 만들어 놓았습니까.

또 어떤 아내는 남편이 감옥에 간 후 빚 때문에 집을 집달리에게 고스란히 빼앗기고 남편이 간첩이라는 충격과 집빼앗긴 충격 때문에 정신착란증이 되어 부딪치는 사람들에게마다 따돌림을 당해 아이들 데리고 벌어 먹고 살아야 될 입장인데도 취직길이 막혔으며 장사할 수도 없어 농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살아나긴 했으나 여전히 따돌림을 당하며 방황하는 그 피맺힌 한을 과연 누가 보상해 주겠습니까.
단란했던 가정들, 행복했던 가정탑을 하루아침에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선량한 가장들을 끌고가 무슨 증거가 있다고 사형, 무기, 10년, 15년이란 중형을 과연 권력이 무엇이건대 떡먹듯이 밥먹듯이 간첩의 누명을 씌워 놓는단 말입니까. 저희들은 가는데마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엠네스티에서 인혁당가족들에게도 영치금을 준다고 오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웬일인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그러나 고마운 마음에 저희들은 몇명이 모여서 엠네스티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계신 목사님이 하는 말이
인혁당 가족에게는 중앙정보부에서 영치금을 못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호소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몇날 며칠을 울면서 호소문을 써서 종로 5가에 있는 목요기도회장으로 뛰어들어 호소문을 낭독하였습니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몇몇 목사님들이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습니다. 명동성당 기도회장 등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호소문을 낭독하러 다녔습니다.
명동성당 기도회에서 인혁당이 조작이라고 노골적으로 파헤치는 글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리고 3일만에 저는 정보부로 끌려갔습니다. 나중에 알보고니 10여명의 아내들이 똑같이 연행되어 왔습니다. 각방에 데려다 놓고는 취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옆방에서 취조당하는 이수병씨(사형) 부인은 젖먹이 어린애까지 데리고 왔는데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리지르고 윽박지르고 욕을 하면서 취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틀을 한잠도 자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진술서가 끝나니까 남편이 인혁당원이라는 각서를 쓰라는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못쓰겠다고 항의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인혁당원이고 공산주의자라는 납득이 가는 증거를 대주면 하라는 대로 협조하겠다고 애원했습니다. 그런 아무 증거도 제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증거가 없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남편이 무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곤란한 정보부원은 인혁당 사건 공판기록을 갖다 내 앞에 펼쳐놓더니 당신 남편이 재판정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시인을 했는데 왜 죄가 없다고 하느냐 하면서 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세히 들여다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남편이 재판정에서 전부 부인한 것을 시인한 것으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저는 소리질렀습니다. 왜 전부 부인한 것을 시인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느냐고. 정보부원은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얼른 공판기록을 덮어서 치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정보원도 공판기록까지 조작한 것을 모르고 있는듯 하였습니다. 참 답답하고 질식할 것 같은 세상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참고만 있어야 할까요?"
말이 막힌 정보부 한 계장이 "글쎄. 전창일은 공산주의자로 보이지는 않는데 왜 그 나쁜 사람들과 자주 만났는지 그것이 한가지 의심스럽다" 것입니다. 친구끼리 알게 되어 다방이나 술집으로 다닌 것이 인혁당을 조직하여 정부전복 모의하러 다방에서 만났다는 것입니다.
공소사실에 나오는 그 다방을 저는 일부러 찾아가보았습니다. 충무로에 있는 지하다방이었습니다. 의자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다방은 굉장히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조작을 하려면 그럴듯이 할 것이지, 이 다방에서 어떻게 지하당 정부전복 모의를 할 수 있다고 공소 사실에 기재하여 놓았는지, 세살먹은 어린아이라도 웃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다방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각서를 쓰지 않고 4일간을 버티다가 집에 아이들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 모 계장이 말을 뱅뱅 돌려서 적당히 부드럽게 쓴 각서를 그대로 옮겨쓰고 지장을 찍었습니다.
이튿날 목요기도회에서 한 부인이 남편 앨범을 전부 불에 태우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놀라서 기도회가 끝나자마자 그 부인이 사는 김포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집을 찾을 수가 없어 근방에 있는 다방에 가서 전화를 하였더니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집앞에 형사가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다방으로 빨리 좀 나오라고 재촉하였습니다.
왠일이냐고 묻는 저에게 그 부인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들어가자마자 정보원 한사람이 다짜고짜로 멱살을 움켜쥐더니 "이 간첩의 여편네, 왜 까불고 다녀" 하면서 목에 상처가 날 정도로 목을 조이면서 막 욕설을 퍼부면서 호통을 치더랍니다. 이 부인은 너무나 놀라서 얼이 빠졌으며 취조를 받다가 목이 마르다고 물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물 한컵을 주더랍니다. 그래서 반컵쯤 마셨더니 조금 있다가 몸이 비비꼬이면서 성적 흥분이 일어나더랍니다 너무나 괴로워 어떻게 할줄을 몰라 의자밑으로 떨어지면서까지 고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부인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 정보부에서 각서쓰라는대로 내 남편은 간첩이라고 쓰고 지장을 찍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집에 와서도 귀에서는 윙윙 소리가 나며 삼일이 지났는데도 한잠도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부인은 남편과 자기와 같이 찍은 사진과 자기 사진들을 전부 불에 태우고 쥐약을 사다놓고 아이들 셋에게 먼저 먹이고 자기도 먹으려고 하니 큰딸아이가 눈치를 채고 안죽겠다고 막 울더랍니다. 한참 실갱이를 하는데 친정어머니가 마침 오셔서 이 광경을 보고 쥐약을 전부 버리고 한식구가 모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은 얘기를 끝마치면서 "나는 죽어야 해. 이제는 굶어죽을 거에요" 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분하고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호소문 한번을 낭독하여 보지 못한 착하디 착한 선량한 아내를 왜 흥분제를 먹이면서 희롱을 한단 말입니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보원들의 그 악랄함을. 그후 그이의 친정어머니는 놀란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어 한달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들은 이런 아픔과 수난을 딛고 헤쳐나가면서 드디어 1975년 4월 8일 . 생각만 하여도 몸서리쳐지는 대법원 마지막 판결의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미리 죽이려고 공판기록까지 변조시킨 이 사건에서 어리석은 아내들은 그래도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재판정에 갔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내리는 그 존엄하신 법관들, 그들은 아무 양심에 가책도 없이 8사람의 목숨을 사형장의 이슬로 보냈을까요! 그 이튿날 1975년 4월 9일, 잊혀질 수 없는 그날! 경악과 그 아픔, 죽고 싶었던 그날, 무슨 언어가 있어 그날의 아픔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수병씨는 사형장으로 끌려들어가면서도 "나는 인혁당을 알지도 못한다. 가족이 보고싶다" 하면서 죽임을 당하였고, 우홍선씨는 "너무도 억울하여 말을 못하겠구나. 나는 죄가 없다. 가족이 보고싶다" 하면서 사형장의 이슬이 되었습니다.
문세광도 가족면회 시키고 죽였다는데 이사람들에게는 대법원 판결이 있은지 24시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가족의 단한번의 면회도 허락치 않은채 사형장의 이슬을 만들도록 그 무엇이 그리도 미웠단 말입니까.
그 가족들이 너무도 불쌍했습니다 울부짖고, 아우성치고, 차길로 죽는다고 뛰어들고, 기절하고 그 여덟사람의 가족들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가족들이 마지막 소원이 성당에서 남편들의 시체를 놓고 합동장례식을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떻게 시체를 안고 고향으로 갈 수가 있겠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소원도 들어주지 않는 피도 눈물도 없는 흡혈귀같은 악마들이었습니다.
응암동 성당으로 들어가서 장례식을 하려는 송상진씨 시체 담긴 차를 기동경찰은 애원하며 울고 매달리는 가족들을 짓밟으면서, 신부님과 목사님들이 결사적으로 시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항의하는데도 문신부님의 다리를 평생을 쓰지 못하게 골절상을 입히면서까지 시체차를 하늘 공증으로 들어가지고 화장터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딸인 박근혜의원은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에서 발표하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이다. ( 2005년 12월8일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
라고 했는데 적어도 대권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런 시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功'에 덕을 볼려면 '過'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그의 딸은 이런 아버지를 두고 다른 대통령( 노무현대통령 )을 향해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쌍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보이느냐?" 라고 했습니다. '참 나쁜 대통령'이란 말을 써서 발끈한 네티즌들 풍성한 '댓글잔치'를 벌이더군요. http://blog.naver.com/lifeofx/110013134670
귀중한 아침 시간 인혁당 사건에 관한 기사를 2시간 정도 검색해 읽어 봤습니다. 2002년도에 제가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했지요? 그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사건이라서......
청소 말끔히하고 조용히 정갈한 기분으로 혼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 신년국정연설'을 들으려 합니다.
사방에서 공격 당하는 '노짱님'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짠~~ 하고 시립니다.
2007년 1월 24일에 노짱님 신년국정연설을 듣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하여 저장해 놓았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