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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 여적(임을 위한 행진곡 )
1980년 초 백기완은 얼음 낀 독방에서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보안사의 모진 군홧발 고문에 무릎과 허리는 꺾였고,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때였다. “기완아! 끝내 이렇게 죽을 거냐?” 내면의 소리였다. 그는 누운 채 감옥 천장에 비나리(시)를 입으로 새기기 시작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앞서서 나가니/산자여 따르라….” 그가 출감한 후 복사본으로 내놓은 장시 ‘묏 비나리’는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수인(囚人) 스스로의 달굶이자 함께 그 길을 나서자는 을러대기였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도청에 들이닥치기 직전이었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에 있던 여성과 학생을 불러모았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가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도청을 사수한 윤상원은 계엄군의 ‘화려한 휴가’(작전명)에 서른살에 삶을 접어야 했다.
82년 2월20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윤상원과 78년 숨진 야학동료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이를 계기로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 모인 ‘산자들’은 ‘앞서 간 이들’을 추모하는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를 기획한다. 이 노래굿의 마지막에 ‘묏 비나리’를 원작으로 황석영이 각색하고 현재 음반사 사장인 김종률(당시 전남대 3학년)이 작곡한 노래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이후 각종 집회와 시민행사에 빠지지 않고 불리며 민중의례로 자리잡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2009년 12월2일 백기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30년 전 군홧발에 짓밟히던 기분”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가 내년 5·18 30주년을 맞아 시대상에 맞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5월의 노래’를 공모하려 한 데서 그의 소회를 듣고 싶었더랬다.
행진곡’까지 바꾸겠다고 해서다. 흐르기에 강인 강을 흐르지 못하게 하면 지난달 행정안전부가 공무원노조 행사 때 민중의례를 금지하더니 이젠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바꾸겠다고 해서다. 흐르기에 강인 강을 흐르지 못하게 하면서 -강을 살린다-는 삽질 궤변이나, 광주와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억을 정부가 지워버리겠다는 오만이 어떻게 다른지가 궁금했더랬다. 백기완은 이렇게 덧붙였다.
“만행이다.”
<경향신문 유병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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