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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묘역에서 3 - 망월동 구 묘역

소금눈물note 조회 825추천 19201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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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역이 조성되면서 많이 옮겨졌지만 아직도 많은 묘비들이 여기에 남겨져있군요.
햇살은 너무나 환해서 저 나즈막한 봉분 앞을 지키고 있는 묘비들이 사뭇 비현실적이기까지 합니다.

얼마만인가.
오래 전, 기형도의 유고집을 들고 왔었습니다.
그 책에 씌어져있던 한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무등(無等)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 속에 무등은 있었다. 나는 지금 충장로와 중앙로를 가로지르는 금남로 3가와 4가 사이 '충금' 다방 2층에 앉아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지금은 저녁6시. 광주에 도착한 지 2시간이 흘렀다. 터미널에서 부산이나 해남 혹은 이리 방면의 차표를 끊으려 예매처를 기웃거렸으나 너무 혼잡하고 더러워서 터미널을 버리고 길을 건너 신문들을 한 뭉치 샀다. 내가 써두고 온 기사가 나와 있었다. 갑자기 욕지기가치밀었다. 수퍼마켓에 들어가 필름 한 통을 샀다. 어디로 갈 것인가. 보도 블록 위에 주저앉았다. 황지우(黃芝雨)형에게 전화를넣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시간은 많다.

망월동 공원 묘지를 찾아갈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 저사람에 물어도 망월동행 차편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물어 25번 버스가 간다고 알 수 있었고 25번 버스를 타기위해 현대 예식장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공포를 겪었던 사람들일까. 어찌보면 그랬다. 어두웠고 흐미하였다. 거리는 복잡했지만 힘이 없이 늘어져 있었다. 망월동까지 버스는 달렸고 그곳은 외곽지대였다. 버스기사는 나에게 내려서 걸어가라고 했다. 가게집 아낙네는 1시간을 걸어야 한다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망월동 3거리에 봉고차가 있었다. 공원 묘지까지운행하는 셔틀버스였다. 차가 왔다.

 

 '묘지 가실랍니까?' 그는 시내로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나 때문에 한 번 더 운행하겠노라 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가게 집에서 산 카스테라와 비비콜을 먹으며 나는 봉고차에 혼자앉아 묘지로 갔다. 가는 도중 묘지에서 내려오는 한떼의 대학생들을 보았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플래카드를 든 방송대 학생들이었고 봉고차는 이윽고 묘역에 도착했다. 나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제3묘원을 올랐다.

 

만장 같은 격한, 그러나 햇빛에 바삭바삭 마르고 있는 수십 개의 붉고 검고 흰 현수막들과 무덤들이 있었다. 나는 꽃 한송이 소주 한 병 없이 무덤 사이를 거닐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무명열사의 묘, 박관현의 묘, 묘비명 사이를 걸으며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묘원은 아무도 없었고 나 혼자였으며 열사(熱沙)였다. 너무 뜨거워 화상처럼 달구어진 내 얼굴 위로 땀이 사납게 흘러 내렸고, 그것들이 내 눈 속에 들어갔다. 나는 눈물을 닦는 사람처럼 자꾸만 눈가의 땀들을 닦아 냈고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마른꽃 다발과 뜨거운 술병, 금이 간 성모(聖母)상들을 넘어 간이 화장실을 들렀다. 변기속에는 죽은 구더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제3묘원을 나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탔을 때 50대 후반(혹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낙네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소녀와 함께 봉고차에 올랐다. 퍼머 머리에 찌든 얼굴, 갈라진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 촛점이 흐린 눈동자, 검게 탄 피부, 가는 몸매,흰 반팔 남방, 갈색 면바지, 굽 없는 흰 샌들을 신은 촌부였다. "앞에 타세요." 운전사가 말했다. 50대로 보이는 기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한열(李漢烈)이 어머니에요." 나는 좌석 앞으로 옮아갔다.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했다. "묘지 다녀가세요?" 나는 "한열이 선뱁니다. 연세대학교 선배예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학교 보내면 뭘해요. 이렇게 돼 버렸는데." 여인은 말했다. "이따금 이곳에 다녀갑니다." 늙고 지친 얼굴이었다. 퍼머 머리의 절반이 백발이었다. "한열이 누이의 딸이예요." 봉고차는 그녀와 나만을 싣고 달렸다. "시내로 곧장 들어갈랍니다.

 

"오늘은 퇴근하는 길이에요." 기사가 말했다. 3거리에 차가 닿았을 때 서너 명의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소리쳤다. "묘지 갑시다!" "이런, 난 시내로 퇴근하려 했는데..."기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저희가 내리지요. 저들을 태워주세요." 나와 한열이 어머니는 내렸다. 봉고차는 또다시 묘지로 갔다. 우리는 25번을 기다렸다. 내가 가게에 들어가 음료수 캔 세 개를 샀을 때 버스가 왔고 나는 스트로도 받지 못하고 허둥지둥 버스로 올랐다.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것 드세요."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캔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했다.나도 말이 없었고 여인도 침묵이었다. 지치고 피곤한 얼굴, 누군가 건드려도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햇빛에 검게 탄 촌부.치산동에 산다고 했다.

 

버스가 서방시장에 섰을 때 한열이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안녕히 가시라고. 나는 손녀딸의 손을 한번 잡아 주었다. 그들이 내렸고 버스문이 닫혔다. 갑자기 창 밖에서 한열이 어머니가 난처한 얼굴로 소리쳤다. 버스는 떠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한 소년이 승강구 부분에서 무엇인가 주워 창 밖으로 던졌다. 흰색 맥고모자를 썼던 한열이 조카의 앙징맞은 고동색 샌들 한 짝이었다.

버스는 달렸고 나는 금남로 입구에서 내렸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무등은 구름 속에서 솟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걸었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이 대리석처럼 무거웠다. '충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가방을 던졌다. 커튼은 햇빛에 바랜 핏빛이었다. "1년 전이지요. 7월5일이에요. 3남매중 큰 아들이지요." 한열이 어머니는 한숨을 토하듯, 그러나 힘없이 중얼거렸지만 멋 모르고 캔만 빨아먹는 어린 손녀딸의 손을 힘들여 쥐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의 뒷모습과 너무 흡사했고, 그것은 감상(感傷)도 계시(啓示)도 아니었다.

-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 출판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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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어미의 가슴에 한으로 남은 그 아들.
그리고 우리들의 가슴에 남은 사람.

그를 찾아왔던 기형도도, 기형도가 남긴 유고시집에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이름표를 붙여주며 그를 애달파하던 김현도 오래 전에  떠나고...

미안하고 엉뚱한 말이지만 나에게 있어 광주 망월동은 "오월항쟁"보다는 그 기형도의 기억이 먼저였습니다.
안개낀 방죽을 터벅터벅 걸어 일찌감치 떠난 그 별의 이름. 비명같던 그의 시들로 얼룩지던 어린 문학소녀의 치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망월동은 잊고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사(熱沙)의 한낮을 진땀을 흘리며 서 있던 그 사람처럼, 나도 팔월의 뙤약볕 아래 달궈진 빗돌들 사이에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이런 거였구나. 이런 거였구나...

다녀가고 몇 날을 뒤척이던 밤들, 아무 기억도 이력도 없이 행복하고 노곤했던 젊은 날의 나는  그날 이후로 아주 많이 비틀려졌습니다.

오늘 여기에 서서 다시 그 슬픈 이름을 생각합니다.
기형도, 기형도...
나를 망월동으로 이끌고 이한열을 만나게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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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타버린 담배꽁초와 소주 한 병
이 무덤의 주인공을 찾아온 사람도 이 눈부신 햇살 아래 망연히 앉아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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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박승희.
시퍼런 청춘을 불사르고 그렇게 떠나야 했던 사람들.
이 언덕에는 젊은 "열사"가 참 많습니다.
시대가 남긴 슬픈 무늬들. 80년대엔 젊은 학생들이 여기로 왔고 이후에는 노동자들이 또 이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는 이런 이름을 더 많이 만들게 되는 건 아닐까.
뒷목이 서늘하면서 이 불안이 어쩌면 기우가 되지만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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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을 떠나면서 신묘역을 안내하던 분이 전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날 초로의 중년남자 세 분이 왔더랍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계속 머뭇거리시더라네요.
그 남자분은 5.18묘역에 참배를 세 번째 오는데도 당시 유해를 쓰레기차에 싣고 가서 매장한 구 묘역은 가보지를 못하고 신묘역만 돌아보고 가곤 하셨나봐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기다리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찌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말만 하시더래요. 대구에서 오신 분인데 올 때마다 구 묘역에 이번에는 가 보겠다 하고 굳은 마음을 먹고 오면서도 차마 들어서질 못하고 번번이
되돌아서야 했답니다. 그럼 오늘 저와 함께 가보자 하고 안내하시는 분이 이끌었대요.

그분의 사연인즉 이랬습니다.
전북 무안에서 나시고 대구에서 성장해서 군입대를 하게 되었던 그 신사분, 그분의 부대가 어느날 느닷없이 간 곳이 바로 여기였던 것입니다. 그분으로서야 전시상황이었으니 낮에는 총을 쏘고 밤에는 막사에서 토막잠을 자고 했겠지요. 그러다 밤에 느닷없이 깨워져서 나가 쌓여진 시체를 구덩이째 묻곤 했답니다. 광주 사람이 아니니 거기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고 밤이니 더 가늠이 안되겠지요. 그래도 군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니 나중에 암매장된 시신들이 알려져서 발굴되곤 했답니다.

그런데 이 분의 고통은 그 이후의 어느 밤이었습니다.
한 분대가 열세 명이라면서요. 어느 밤에 그 분대가 깨워져서 얼결에 나가보니 트럭 두 대가 서 있더랍니다. 트럭 하나당 시신 사십 구. 그렇게 팔십 구의 시신을 묻어야 하는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보니, 한 트럭의 시신은 말 그대로 모두 주검이었는데 나머지 한 트럭은...중상임에 분명하였으나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거지요. 차마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할 일이었으나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하는 당시의 군인의 신분, 그 분은 제정신이 아닌 채로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 거기가 어디였는지도 몰라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들...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해요. 이 죄를 어찌할지 나는 죽을 때까지 눈감지 못할 겁니다." 살릴려고 하면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살릴 수는 있지 않았을까, 죄책감과 무력감에 몸부림치며 살아온 고통스러운 세월, 그 분은 그렇게 광주에 와서, 거기까지 와서 차마 구 묘역까지는 가보지를 못하고 맴돌며 괴로와해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피해자예요. 내 뜻이 아니었어요.."
"네. 선생님도 피해자이십니다. 분명히 선생님도 그 날의 피해자이십니다."

따지고 보면 고향, 스물 몇의 젊디젊은 청년이었던 그 분, 한 시대에 한 땅에 태어나 자신의 의지나 양심과 아무 상관없이 군인으로 시민으로 대치되어 차마 끔찍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던 그 분의 고백.

주께서 그 분의 영혼을 위로해주시기를.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은 정작 다른 사람이었던 것을.

시민군이던, 당시의 군인이던, 누굴 원망하고 비난할 수가 없이 그저 가슴 아프고 서러울 뿐입니다. 이 정도의 냉정함으로 그 사람들을 서러워할 수 있는 건 역시나 당사자들이 아니어서, 가슴에 한이 켜켜이 박힌 사람들이 될 수 없음에서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하실까봐 차마 입밖으로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봄 햇살은 참말로 서럽도록 맑고 환합니다.
청춘을 여기 두고 누운 젊은이들과 이유없이 스러져야 했던 광주사람들, 민주주의를 위해, 사람다운 삶을 절규하던 노동자들이 이젠 조용히 잠든 이 봄 언덕에서 나는 그저 저 나즈막한 잠자리위에서 맴돌고 있는 봄햇살에 눈이 아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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