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21일 방어진 바닷바람이 쌀쌀한 겨울 끝자락 가입학식이 있던 날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점심시간에 살짝 이슬이 비쳤습니다. 윗분께 말씀 드리고 조퇴를 했으면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 시절에는 그랬습니다. 윗분들의 권세와 위세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권위는 -배려와 사랑- 위에 생긴다는 걸 모르시고 그것이 권위인 줄 알고 군림하던 시절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두 교감님들 간(?)도 크셔요. 학교에서 아기 낳으면 어쩌려고...?
그 때는 아기를 낳아야 출산휴가 30일이 주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출산 하는 날까지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퇴근길에 서둘러 미장원에 들러 우선 머릴 짧게 잘랐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손질하기 쉽게...
26년 전 어린이날 기념 사진 같습니다. 촌스러운 거실 모노륨, 소파천, 플리스틱조화가 꽂혀있는 케잌... 지나고보니 세상 걱정 한 줌 없던 참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손주들을 끔찍히 여기시며 직장 다니던 며느리 대신 살림을 보살펴 주셨던 시어머니는 벌써 이 땅을 뜨셨습니다. 10년을 같이 살며 애증이 교차했던 분! 다 부질없는 일이지요. 친정어머니랑 산 세월보다 시어머니와 산 세월이 더 깁니다.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기 때문에 철들고 같이 산 세월이 친정어머니보다 시어머니랑 산 세월이 더 긴 셈입니다. 친정어머니는 그립단 생각이 없는데 시어머니는 가끔 생각이 납니다. 정이란 건 같이 산 세월과 비례하는 것 같아요.
둘째 아이라선지 진통의 주기가 급속도로 짧아지며 강도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나마 20개월 된 딸이 큰 위안이 되어서 그 아이를 잡고 진통을 하다 진통이 없으면 병원갈 준비를 반복했습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도대체 시어머님이 어느 집에 계신지 알 수도 없고... 진통이 없는 짧은 틈을 타서 앞집 아줌마한테 택시 좀 불러달라고 해서 딸아이를 맡기고 밤 9시가 넘어 혼자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인상좋게 생기신 백발의 의사가 열심히 분만을 유도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출산율이 높았던 시절이고 젊은이들이 바글대던 -現代타운-이다 보니 출산만 하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병원에서 내보내려고 하던 시절입니다.
병원 측은 자정 안에 낳아 입원일을 하루라도 단축하길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의사가 -쉬었다 내일 낳읍시다- 하며 한숨을 돌리셨습니다. 0시 23분에 아들이 온 동네 떠나가듯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나왔습니다.
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시어머님. 두 며느리가 딸만 내리 넷을 낳다가 첫손자를 본 기쁨을 어찌할 줄 몰라 눈에 보이는 병원사람마다 허리 굽혀 합장하며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월 많이 변했지요? 이젠 아들 낳았다고 그리 기뻐하는 세상이 아니고 딸 낳으면 한 턱 쏘는 세상입니다. 그만큼 아들보다 딸이 더 효용가치(?)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딸만 셋을 낳아 시어머니께 구박(?) 받던 형님은 그 세 딸 덕분에 노후가 행복해 보여서 보기 좋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