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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청에서 보내주는 인터넷 기상 예보를 이 늦은 시간에 찾아 들어갔다.
온도에 민감한 돼지들의 안위를 생각하다보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내 몸의 현상이다.
예보에 의하면.
밤인 오늘과 내일은 몹시 춥단다.
물론 혹한은 아니고, 이틀 연속 최고 기온이 7도에서 머물며 그 이하의 기온은 상당히 춥다는 발표이다.
오늘 최고 기온이 영상 17도 이었으니 춥기는 추운 날씨가 될 것이다.
또한 최저 기온이 영하 7도라니 상당히 떨어지는 온도이다.
오전에는 3~4도에 머물겠고.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스케이트장에 대한 말의 서두를 꺼내 보고자 함이다.
내가 1960년생이니 내 유년기를 1965년쯤으로 보고.
우리 동네 이름이 하빈이다.
경상남도 陜** *** ***
합천군.
[합]자는 협(峽)의 변형이라 봐야한다. 즉 협곡(峽谷)할 때 저 협자와 같다.
실제로 내가 어린 시절에는 협천군으로 불리었었다.
"협곡으로 흐르는 강의 땅"
이것이 합천의 지명이 된 것이다.
물론 합천읍에는 합천을 휘돌아 지나는 "황강"이 있어 그렇게 불릴 수도 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 당연히 물은 많게 마련이다.
그 산에 저장된 물은 오랜 시간을 두고 피라미가 살고 있는 그의 강을 적실 것이 아니겠는가?
야로에도 강이 있다.
"야성강"
해인사와 숭산 쪽에서 흘러 온 물이 합수되어 여름 홍수 철에는 자못 그 위용을 대단하게 뽐내는 강물이 우리 야로면에도 도
도하게 흐른다.
88올림픽 고속도로가 나기 전.
우리 야로면은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대구에서 거창과 전라도로 이어지는 26번 국도가 경북 고령을 지나 분기 로타리 삼거리에서 묘산과 야로로 갈라지는 산등성
을 오르면 드디어 야로가 시작되는 것인데.
그 야로의 진입 지점이 대단한 협곡 낭떠러지이다.
바위를 깎아 겨우 낸 길을 지나야 비로소 야로면의 좁은 분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같은 남도인 전라도의 구릉이 많은 지형과는 달리 합천의 협곡은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협] 유순해야 할 남도의 지형이 얼마나 험악했으면 저 협곡의 협자를 썼을까?
산이 높으면 대지가 적을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은 먹고 살기 힘든 땅이더라는 말씀이다.
야로면(冶爐面 ).
여러분은 우선 일제의 저 더러운 욕, "빠가 야로"를 생각하시겠지?
혹여 그렇게 생각을 하시더라도 그러하게 내재된 생각들을 이제는 버리시라.
일제의 잔재를 이제는 확실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손들이 과연 "빠가 야로"가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겠는가?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는 것이다.
[야로]에서.
[야]자는 쇠를 불릴 [야]자이다.
흔히 풀무질 하는 야라고 부른다.
첨어로 대장장이, 꾸미다, 장식하다.
다음 [로]자는 "화로 로"이다.
더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순전히 쇠(鐵)의 땅인 것이다.
그러면 쇠를 다스리는 불의 땅인 이곳의 지명은 어느 시대에서 왔을까?
그것은 다음에 또 쓰기로 하겠다.
지금, 글의 시작과는 달리 엉뚱한 곳으로 많이 변절되었다.
다음은 [하빈]이라는 지명이다.
"河濱". 물 하에 물가 빈이다.
물이 동네 옆으로 흐르는 마을.
이것이 우리 동네의 형상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지도 않겠는가?
"물가에 있는 동네"
일제 때 지 멋대로 만들어진 지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사설도 쓸라고 하면 또 길어 질 것이고...
우짜든.
나는 저 "하빈"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물가, 그것도 보다 큰 물가에 살고 있고.
그 물을 숭상(?)해 내 별명도 "水月"로 만들어 재미나게 살고 있으니 말씀이다.
지금 스케이트장 만든 사설을 쓰자고 했는데 망할노무 밤이 깊으니 내 사색은 동네 역사로 번져 버렸다.
"씨게토"
우리는 동네 강에서 타던 썰매를 그렇게 불렀다.
유년기에 빠져도 적당할 깊이의 물이 지척에서 항상 흐르고 있었으니 저 씨게토를 참 푸지게 탈 수 있었다.
그 스케이트장을 나는 만든 것이다.
그것도 빠져봤자 신발만 버리는 무논을 아주 잘 다듬어서.
윗집 공방에서는 한국 예술 평론가 협의회에서 "올해의 예술가" 상으로 줄 트로피 제작 주문이 들어와 분주합니다.
펜촉을 형상화 했는데 촉의 끄트머리에는 올빼미 한 마리를 잡아넣었습니다.
어둡고 칙칙한 밤에도 직시를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겠지요.
스케이트를 만들었다.
양 신발의 밑창에 칼날을 넣은 서양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국산이다.
자세히 보시면 쪼그려 앉아 타는 일반적인 스케이트와는 다를 것이다.
엉덩이를 퍼질고 앉아 양발로 갈 길을 조정하는 신(?) 개념의 스케이트다.
왜 저 스케이트를 만들었냐고 물으신다면...
초등학교 무렵 나는 방학 때만 되면 여기서 20리 길인 가야면의 외가 집으로 향했었다.
겨울이면 외삼촌들이 나무하러 산으로 오르시면 나도 쫄래쫄래 따라 나서고 나와 또래 이상의 형들이 밤에 해먹는 국수 추렴도 참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겨울인데 압권은 당연 썰매 지치기가 아니겠는가?
위의 사진에 있는 저 썰매를 나는 외가에서 처음 만난 것이었다.
나보다 4살 위인 외삼촌이 나의 뒤에 앉아 썰매를 지치고 나는 그 앞에서 방향을 조정하며 신나게 달리는 것이다.
어느 날 외삼촌들은 나를 보다 큰 강으로 원정 썰매를 데리고 나섰던 것이다.
그 위치가 어디냐 하면, 해인사에서 내려오는 큰물과 성주군과 갈림 지점의 백운동의 물이 합수 되는 지점에 래암 정인홍 선생이 지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강의 가장자리에 바짝 붙은 바위 위에 제법 규모를 있게 만들었는데.
양쪽의 물이 합수되어 아주 커다란 소(沼)가 그 높은 바위 밑에서 둥글게 물을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봐도 얼음 밑에 보이는 소의 푸른 물색은 참으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냇가의 얼음이라는 것이 물이 깊은 곳일수록 두께가 얇다.
그것을 물의 숨통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숨통을 지날 때 오그라드는 가슴의 서늘함이란...
그 시절 외삼촌의 나이라 해봤자 중학교를 다닐까 말까한 나이였으니 나나 외삼촌은 거기서 거기인 철부지였을 것이다.
신기술이 접목된 저 스케이트는 나를 얼마나 신나게 만들었을까?
지금 생각을 해도 그 때 외삼촌이 저어주어 내 맘대로 빙판을 누비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그 기억을 더듬어 만든 것이다.
그것도 보완을 하고 해서 두 개나 만들었다.
물론 다 큰(?) 내가 저 스케이트가 그리워 이 작당을 하고 있겠는가?
10호 정도 되는 이 동네에 어린 아이들이 많겠는가?
그렇다고 내 자식이 어려서 그것들 호사하라고 만들었겠는가?
윗집 선수가 결혼을 늦게 해 아직 초등학생인 개구쟁이 두 녀석들을 염두에 둔 것은 맞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저것을 만들어 보고자 함은 내 안에 남아있는 우리 유년의 기억들과 그것에 대한 정서가 아직 남아있고 그러한 해찰궂음이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 저 논을 만든 과정도 참 복잡하다.
정대 배씨의 종답인 저 논을 작년부터 내가 짓고 있다.
강이 옆에 있지만 지하수가 워낙 부족한 곳이라 기존의 지하수로는 사용할 물이 늘 간당간당 하는 것이었다.
물이 귀한 동네라 이곳의 주민들은 옛날에 산물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특히 여름이면 시원한 물이 그리운 것인데.
마침 내가 경작하는 논의 아랫부분에서 찬물이 솔솔 나는 것이라 그 시원한 물을 받아다 밥을 말아 풋고추에 된장 찍어 자셨다는 것이다.
지금도 보면 그 찬물이 나는 곳에는 그때 묻어 둔 독이 남아있다.
그곳에는 벼를 재배하기 위해 논에 물을 대는 여름철에만 물이 나는 것이다.
그것이 지하로 흘러흘러 지하의 기온과 합쳐져서 찬 물이 된 것이었다.
지금은 쓰지 않는 그 샘물을 나는 요긴하게 쓸 작정으로 논을 임차했고 물을 만들려면 논에 물을 대야만 했던 것이다.
나락 철이 지나고 볏 집을 썰어 넣었다.
그리고는 찰지게 땅을 몇 번이고 써레질을 했다.
또 그 논을 평탄하게 만든다고 트렉터 뒤에 큰 통나무를 달고는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했다.
그 전에는 트렉터 바가지로 일일이 흙을 퍼서 논둑도 높였다.
한 번은 뒷집 논에서 일을 하시던 할머니가 이런 질문을 해 오시는 것이었다.
“이 늦은 가을에 뭣을 한다고 논을 써레질 하고 있는 기요?”
갑자기 황당하대.
나는 슬며시 웃으며.
“할매 미쳤재 그쟈?” 하고 오히려 농을 건 것이었다.
그렇게 또 씨잘데기 없는 일을 나는 만드는 것이었다.
미친 인사라고 웃어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우선은 저노무 스케이트가 잘 나가나 우짜나 하고 실험을 한 번 해봐야 할 것인데 망할노무 얼음이 얼지를 않는다.
얼음이 살짝 얼었다.
아직은 더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동네 입구 길이 협소해 큰 차 한대가 겨우 다닐 정도여서 이 겨울에 그것을 넓히고 전봇대 뽑느라 분주하다.
전봇대 뽑기.
언 놈의 취임 초기가 생각난다.
위의 사진은 파리가 벽에 붙어 동사한 것이고.
아래 것은 그것들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12월인데도 저것들은 악착같이 생명을 잉태한다.
저러한 꼴은 올해 처음 보는 것 같다.
지구 온난화가 무서운 것이다.
어제 밤 영하 7도에서 저것들은 죽었다.
실험이라면 실험인 사진인 것이다.
청둥오리 떼가 몰려왔다.
겨우내 나하고는 친구가 될 것이다.
겨울 진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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