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곡 : Denean/To The children
해제반도 가는 길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올 걸 그랬어
흔들리는
흔들리지 않는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바다로 열린 무덤들
살아온 날들이야 그렇다 치고
살아가야 할 날들은 또
얼마만큼의 무게로 나의 어깨를 짓누르는지...
몸도 조금 비워두고 올 걸 그랬어
휘청이는
비틀거리는 길 위의 날들이여
돌고 돌아도
눈물 아닌 곳 없고
피고 지는 풀꽃들
그리움으로만 내려앉나니
몸도 마음도
그렇게 놓아주면 될 걸 그랬어
해제반도가 어디야?
그저 지명만으로는 어디에 있는 곳인지 생소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 할지도 모른다.
해제반도는 그렇게 일반적인 가시권에서 조금은 비켜서 있는 땅이다.
전남 무안, 현경면을 지나 바다 저편으로 가로지른 좁다란 길을
따라 가다보면 섬과 같은 뭍이 지도(智島)이고,
그 끝에 뭍과 같은 섬이 임자도(荏子島)이다.
해제면은 30 여년 전에 개펄을 메워 길을 내면서 겨우 섬을 면한 형국이다.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뭍은 가늘고 긴 사슴뿔 모양을 하고 있다.
너른 구릉이 나타났다가도 고개를 넘으면
들판을 깊숙하게 파고든 바다와 맞닥뜨린다.
서남해안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해안선,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황토들판이 펼쳐져 온통 붉은 빛이다.
현경면소재지를 지나 바다에 둘러싸인 포구를 찾아갔다.
마치 초승달 모양이라서 이름도 달머리라는 뜻의 월두(月頭).
동에서 보나 서에서 보나 반달같이 생겼다는 뜻의 평범한 어촌이다.
포구는 작지만 뭍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일 만큼 정겹다.
높은 산이 없어선지 바닷가에는 언제나 바람이 분다.
바람 잘 날 없는 바닷가의 보리밭.
파도보다 더 일렁이는 푸른 들판이 마치 고흐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역동적이고 환해서 차라리 어지럼증이 난다.
청보리밭 한 켠엔 수백년 풍상을 겪었음직한 허리 굽은 노송 한그루가
가지 하나 끄떡이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아래는 붉은 땅, 위로는 시퍼런 하늘.
하늘과 맞닿은 구릉지대의 모습이 깊게 파인 판화처럼 선명하다.
사실 해제엔 산다운 산이 없다.
어디를 가나 언덕이 하늘을 이고 있다.
제각각 다른 바다를 끼고 있는 해제반도. 뭍도 다르고, 바다도 다르다.
새악시 볼처럼 붉은 황토밭과 맞물린 푸른 바다가
마음을 저밀 정도로 아름답다.
바로 앞 무인도 도당도까지 이어진 길은 폭이 불과 20 여m.
길 끄트머리엔 ‘마을 주민들의 양식장이니 조개를 함부로 캐지 말라’는
낡은 안내판만 붙어있다.
빨간 지붕을 씌운 통통배 몇 척만 물 위에 떠있을 뿐 바다는 조용하다.
이 곳은 리아스식 해안이다.
육지의 침강 또는 해수면의 상승에 의해서 굴곡이 심한 육지가 바닷 속에
가라앉아 이루어진 지형이다.
이러한 만입(灣入)을 리아(rias)라고 하는 것에 연유한다.
건너편 해안에는 망둥어가 모래밭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손가락만한 작은 망둥어들이 파도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든다.
해안가를 벗어나 마을로 들면 황토들판이 눈에 박힌다.
이 길은 올라서면 푸른 하늘이고, 내려가면 푸른 바다다.
그 푸르름 속에는 알 수 없는,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담겨 있다.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길은 붉은 황토밭과 낮은 구릉들 사이로
점점이 박힌 무덤들을 헤치며 가는 길이다.
그 너머로 바다는 너무도 아련하다.
해제반도의 한쪽 끝자락 도리포는 아름다운 어촌마을이다.
철부선에 타고온 차를 싣고 15 분의 짧은 뱃길 끝에
임자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임자도는 모래섬이다.
그만큼 이곳엔 섬전체가 잘디잔 모래로 덮여 있다.
논에 물을 가두기 위해 개펄을 파다가 객토를 해야 한다.
어쩌다 갯바람이 몰아치면 논과 밭은 하룻밤 사이에 모래밭으로 바뀐다.
민가 마당들도 모래가 쌓여 작은 사막이 된다.
오죽하면 '임자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을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까 싶다.
임자도엔 대광해수욕장만 있는 건 아니다.
진리에서 남쪽으로 들어 이흑암리를 지나면 은동마을,
완만하고 꽤 널찍한 모래밭의 어머리해수욕장이 나온다.
이 해수욕장 경치의 절정은 왼쪽 끝의 용난굴이다.
이무기가 바위를 깨고 나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굴이다.
수십길 절벽 아래, 아래위로 째진 검은 굴이 뚫려 있다.
그러나 짧은 일정의 먼 섬여행인지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어느 곳 하나 평범한 지형이 없는 땅.
이곳에는 폭 100m 안팎의 작은 해협이 많다.
그러나 물이 빠지면 바다는 수십 만평의 개펄로 변한다.
밀물과 썰물 때의 모습이 아주 딴판이다.
해제반도 들머리인 현경면. 때마침 썰물이었다.
건너 작은섬까지 넓은 개펄로 변해 있었다.
서쪽은 나지막한 구릉. 그 너머에 역시 파란 바다가 보인다.
나는 잠시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머무름 또한 영원할 수 없으니,
저물기 전에 다시 길로 나서야 한다.
그 길 위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만날 수 있을는지...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점차 울음과 멀어져 가는 과정일 게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미소가 잦아들 무렵
일상이던 울음소리도 작아져만 간다.
굳어져 가는 우리의 표정은 어쩌면 웃음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울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울 일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닐 터. 꾹꾹 누른 울음들은
차곡차곡 가슴 속에 쌓여 서늘한 덩어리로 굳어져가고 있을 뿐이다.
바둑판 모양의 드넓은 염전과 일자로 길게 늘어선 소금창고의 행렬.
서울염전이다. 소금창고들이 소금 밭을 길게 가로 지른다.
사과궤짝 같고 전쟁통의 판자집 같은 창고는
수 십 년 시간의 두께로 거무튀튀하다.
소금창고 옆에는 창고 수 만큼의 전봇대가 하나씩 줄줄이 늘어섰고,
축축 늘어진 전깃줄이
낡은 건물과 어울려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소금을 만드는 건 바닷물과 햇볕, 그리고 염부의 땀방울이다.
밀물 때 저수지에 가두었던 바닷물을 개펄을 다져 만든 염전 위로
끌어와 태양에 말린다.
조금 더 짜진 소금물을 무릎 높이의 낮은 슬레이트 지붕의
함수창고에 보관했다가 다시 염전으로 꺼내 말리기를 수 십여 차례.
20 여 일이 지난 마지막 타일이 깔린 채렴장에서
대파 (소금물을 미는 고무래)질을 통해
눈부시도록 새하얀 소금 결정을 빚어낸다.
소금을 쌓아놓고 간수가 빠지기를 기다리는 곳이 나무로 지은 소금창고다.
긴 줄로 늘어선 퇴락한 소금창고의 풍경에 가슴은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붉은 석양은 소금물이 자작자작한 염전 위로 녹아 들고,
세월의 무게를 못이긴 소금창고의 너덜대던 나무 문짝은 휙 하니
한 자락 지나는 바람에 ‘끽~ 끽~’ 목 쉰 울음소리를 토해 낸다.
대광해수욕장의 해변의 길이는 12 km로 거의 왕복 하프마라톤 코스에 가깝다.
실제로 이곳에선 해마다 7월이면 해변마라톤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물이 다 빠지면 모래밭 폭이 200m를 넘는데,
절반쯤은 물반 모래반의 부드러운 수렁이다.
모래가 얼마나 고운지, 발에 밟히는 감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땅거미 막 드리우려는 해질녘의 해안선. 시간이 멈춰진 듯, 꿈도 멈춰진 듯
마냥 가슴이 시려온다.
풍경이 주는 왠지 모를 서글픔에 가슴이 저며오기 시작한다.
깊은 그 울림에 가슴 속에 굳어있던 서늘한 덩어리가 조금씩 녹아 내린다.
세상의 모든 설움이 농축된 듯, 노을지는 해변은 그렇게 처연했다.
물 먹은 모래사막의 주인은 손톱만한 집게와 엽낭게들이다.
눈을 낮추고 귀를 기울이면 다 들린다.
삽시간에 수만개의 모래구슬을 깔아놓는 엽낭게들의 모래 다루는 소리,
물결에 빚은 무수한 모래무늬와 집게들의 기하학적인 이동로...
엽낭게들이 먹이를 취하고 뱉어낸 작은 모래경단들로
차마 발을 내딛기가 조심스러워 진다.
국내에서 가장 긴 모래밭을 자랑하는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 이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쉬지 않고 걸어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긴 해수욕장이다.
사륵사륵 잔파도 향연에 밤새 속옷자락 쓸리는 소리가 나더니
임자도 해변에 아침이 왔다.
물살은 안개에 감싸이고,
안개는 물살에 포개져 모래밭 물이랑이 흥건하다.
온 바람이 물안개를 밀어내자 물살 돌아와 찰랑일 때까지
모래밭엔 수백 수천겹의 속옷 무늬가 남았다.
앞엔 고깔섬 무리가, 왼쪽 앞바다엔 뭍타리·섬타리 섬이 놓여 있다.
멀리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해안경치를 지닌 노륵도가
아스라이 수면에 떠 있다.
물가 쪽 모래밭은 연하지만, 물기가 빠진 중간쯤까지는 매우 단단해,
자동차가 다니고 경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을 정도다.
드넓은 해변 군데군데 주민들이 숭어·밴댕이·게 따위를 잡기 위해
쳐놓은 지주식 그물망,
그물 주변에 몰려든 갈매기들이 바닷가 풍경을 한층 더 정겹게 한다.
섬마을은 거기에 있었다.
하늘과 조금 더 가깝고 바다와도 친숙한 얘기가 거기 있었다.
가슴 한 구석에 가물거리는 기억 같은 비릿한 바다 내음을 풍기며
늘 거기 있었다.
도시인들은 한갖 추억의 정경이지만 그들에겐 현재 살아가는 삶이었다.
사람들은 가진 게 적으면 초라하고, 많으면 거만해지기 마련인데,
그래도 이곳 섬 사람들은 넉넉하진 못해도 부끄럽지 않게,
욕심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 해가 지면 섬은 슬며시 외로움으로 떠오른다.
돌고 돌아도 섬은 끝도 없이 쓸쓸하고 그리고, 마침내,
기어이 섬 속에서조차 우리는 섬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래서 모든 그리움은 서로 단절되어 외로우면서도 서로 묶여 있다.
삶의 정체는 결국엔 어찌할 수 없는 그리움이었을까?
별빛은 갈 곳을 잃었다.
마치 모든 허물을 이해한다는 듯, 용서한다는 듯 어둠이 세상을 덮는다.
땅 위의 초라한 풍경은 노을지는 바다에서 순결해진다.
잠깐 동안 세상이 착해진다.
바다가 안개를 덮고 잠들어 있다.
해가 떠오르는 기척을 듣고 안개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한다.
그러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인간과는 달리 자연의 대화는 이렇듯 완벽하다.
꽃이 진다고 봄이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이곳에서 봄이 무르익을수록 초록이 물결친다.
끝간 데 없이 아득히 펼쳐지는 양파밭과 마주하면
형형색색의 꽃보다 아름다운 게 초록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왜 나 있던 곳을 뒤로하고
낯선 곳에서 낯설지 않는 풍경에 감탄하는가.
여행의 끝자락에서 나는 소통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의 말보다 자연의 언어가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해받지 못한다고,
외롭다고 우린 왜 언제나 어린아이처럼 투정했던가.
나는 그만 부끄러워 진다.
그러나 이제 조금은 알겠다.
부끄럽고 아파하고 신음하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예쁜 존재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