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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에 올린 글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저도 여기에 올려주신 많은 글들을 읽으며 제 글과 사진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슬프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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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5일 어린이날! ktx를 타고 김해 봉하마을 가다.
따뜻한 날씨에 북적거리는 서울역, 설렘을 가득 안고 조용한 기차 안에 자리를 잡았다.
봉하마을을 거쳐 경주로 가는 여행길에서 준비한 책은 역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4월 말에 사놓고 잘 읽히지 않아 괴로워 하다가, 아 - 봉하와 경주에서라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가방 안에 넣었다. 그의 생각에 다가가고 싶다. 교보에서 주최했던 독자와의 만남에 가고 싶었는데 저자의 개인 사정으로 취소한다는 문자가 왔다. 모두가 그를 죄인처럼 여기는 마당에 독자들과 국가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결정의 과정을 생각하다가 마음이 아팠다.
진영역에 무사히 도착해서, 10번 버스를 타고 봉하마을 도착:)
다행히 사람들이 북적거려 마음이 따뜻했다. 생가와 기념품 가게를 들러, 국화꽃 한 송이를 사고 나도 헌화.
국민들의 기부로 만들어진 박석들. 묘역 주위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말들을 천천히 읽으며 걸었다. 눈물을 참느라 정말 혼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에 온 이야기는 부모와 자식이 드러난 말들. 그가 꿈꾸던 세상은 내 자식이 살아갈 일상이라니. 자식의 일상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세상은 얼마나 좋은 세상일까. 딸에게 누군가를 소개해 준다는 것, 자식들에게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표현하는 것, 얼마만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식에게 알려 주는 것일까. 아마 내가 비판하고 싶은 사람들은 진정한 존경을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나의 박석:) 그때의 돈 몇 만 원으로 노짱 옆에 있을 수 있다니, 행복했다. 새겨진 글귀를 직접 보니 기분이 야릇. 2년 전쯤, 정말정말 특별하고 좋은 말을 적고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했지만, 결국 쓸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의 원리적인 말. 그렇지, 강물은 절대 바다를 포기하지 않으니까. 끝끝내 바다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알기 때문에라도, 그 이상을 포기하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진짜 진보주의자이다.
"새 시대로 안내하는 다리가 되겠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구태와 잘못된 관행을 깨끗하게 청산하여 다음 후배들이 다시는 진흙탕 길을 걷게 하지 않으려 한다." (2003년 11월 5일 원로지식인 등 오찬 인사말씀 중)
노무현 대통령의 영광스러웠던 모습들 아래에 이 말이 써 있었다. 노무현의 탁월한 어휘 선택과 문제 설정, 논리, 당당함, 말하기 방식에 항상 감탄했지만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나는 꽤나 또 한 번 반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얼마나 새로운 시대를 열망했는데. 그 열망을 뒤로 하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을까.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그렇지 못했을 때 얼마나 멋지게 구시대의 막내를 자처했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가 현실 정치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바보처럼 너무 잘 알았던 현명하고 의연한 사람.
부산 동구 국회의원에서 떨어지고 쓴 편지라고 한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는 보여주기식 정치를 하러 시장에서 악수를 한 적이 없고 실제 정책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했다. 자신이 말한 원칙을 지키셨군요, 노짱.
출세와 부귀영화는 바라지 않는다는 문장. '이렇게' 살아온 사람이 '그렇게' 사라진 것이 억울하고 아까워 죽겠다.
금뱃지가 없더라도 할 일은 많이 있다고 믿는 사람. 아, 비포선셋에서 셀린느가 그랬지.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신문에 한 자 실리지 않더라도, 성공과 부귀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며 감사하게 살아간다고. 아프리카 학교에 겨우 연필을 제공하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고.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 박석의 글귀를 쓴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겠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간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야?!)
역시, 남에게 같이 하자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간디의 말대로, 나 자신 스스로 세상에서 원하는 변화가 될 수밖에 없나 보다. 추모 전시관을 나오며 뒤를 돌아 한 컷.
또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묘역을 한 번 더 둘러 보았다. 대통령 노무현이 적힌 묘역 앞에서는 차마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아무 것도 없는 소박한 시골 동네와 아방궁이라는 더러운 표현이 대비되며 착잡한 마음으로 걷고 또 걸었다. 여기에서 행복한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할 그가 금세 과거가 된 것 같아 두려워졌다.
정치에 대한 진지함을 드러내면 특이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 사회는 아마도, 계속, 노무현의 죽음은 과거이고, 그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1야당인 민주당도 언제나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당연히 정치적인 문제이다. 그가 하려고 했던 일들, 각 분야의 합리적인 시스템, 권력의 분산과 절제, 개방과 성장, 복지, 규칙 속에서 자유로운 시장, 지역균형발전, 검찰과 언론의 개혁 속에서 그는 죽어갔다. 보수만의 나라도 아니고 진보만의 나라도 아닌 현실 정치 속에서 합리와 진짜 진보를 어떻게든 의제화하고 집행하려고 노력하다 죽어갔다.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막연한 진보적 이상도 싫다. 개인으로서는 얼마든 꿈꿀 수 있으나 진보와 보수가 섞여 살아가는 이 어려운 현실 사회에서 정치인이 있어야 할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의 진보적 정책을 공론화시키고 이뤄내기도 했던 노무현이 존경스럽다. 그의 치열했던 고민의 흔적과 공부에 언제나처럼 존경을 보낸다. 그와 차별짓기 위해 소리를 질렀던 진보들은 그가 하고자 했던 것들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언제나 현재, 미래와 연결되어 있길 바란다.
덧붙여 유시민이 그와 똑같은 비난을 받을까 봐 (벌써 받고 있는 것 같아) 세상이 무서워진다.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며, 다음에는 누군가와 함께 봉하마을을 찾고 싶다. 나도 내가 원하는 변화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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