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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찜찜한 것은 좀 못 견뎌하는 성격이라
다시 수정해서 올립니다.
제국(?) 시대의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고딩 중에서
유시민군을 찾아보세요.
유시민 대표에 대한 인물평을 할 때
정치활동 당시의 언행과 정책지향을 보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헌데 그것만으로 그사람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계산하지 않고 행동하면서도
어느정도 삶의 가치관과 철학이 형성된
청소년기, 고교시절의 태도를 보면
그가 본디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고교동기이자 나의 선배이신 신장식 국민대 교수가
우리의 궁금함을 해소해 줄 증거를 여기 남기셨다.
글 쓴기억이 오래된 나는 단지 존재감을 확인하고
부족한 뽕을 따기 위하여 이 글을 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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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유시민의 고교시절 -
위의 내용으로 유시민에 대한 글을 부탁받으니
그림을 그리는 나로서는
30년전 고교시절의 기억이란게 생각해도 어슴푸레하기 때문에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막막하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지점도 있다.
그런 기억을 단편적으로 적어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먼저 유시민과 나의 관계부터 얘기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사람에게는 과거가 있고 그 과거는 지워지는 것이 아니기에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재미도 있고,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내가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고교 1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3년 동안 같은 반이었고
대학도 서울대학교에 같이 진학했으며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 중
가장 오래된 친구중 하나가 바로 유시민이다.
우리는 대구의 심인고등학교를 다녔다.
박정희대통령이 만든 평준화 정책이
서울에서는 74년부터 적용되었지만
대구에서는 75년 우리가 입학할 때부터 적용되었으므로
우리는 평준화 제1기에 해당한다.
심인고등학교는 평준화 이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여서
‘뺑뺑이’를 돌려 이 학교에 추첨된 학생들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숨어서 혼자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학교에 배정받은 친구들은 우리를 위로하기 바빴다.
입학 후 반 배정을 받았는데 1학년 1반으로 기억난다.
우리가 배정 받은 반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모아놓은 특설반이었다.
2, 3학년 때도 우리는 문과 특설반에서 공부했으므로
3년 내내 같은 반이어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유시민의 집과 우리 집은
대구를 가로지르는 수성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대봉동, 시민이는 중동이었다.
유시민의 집은 우리 집에서 수성천을 가로질러 건너가서
골목길로 조금 들어가면 있었는데
구멍가게가 딸려있는 작은집이었다.
심인고등은 대명동이어서 우리들의 집에서 학교로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으므로
우리는 버스통학 대신에 자전거로 통학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여러 친구들이 자전거 줄을 맞추어 가며 다녔는데
지나가는 여학생들에게 휘파람도 불곤 한 기억이 난다.
휴일에 자전거로 통학하는 친구들이 모여
지금의 경산을 지나 영천방향 어디까지인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
정말 힘들었든 기억이 지금도 아스라하다.
아침에 비가 오지 않다가 학교 마치는 시간에 비가 오는 날은
자전거 타고 집으로 가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우리는 고3때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께서도 밤늦게 까지 남아서
입시생인 우리를 관리해 주셨고,
주말이나 방학 때는 거의 매일 도시락 2개(점심과 저녁)씩 싸가지고
독서실에 붙어있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가끔 독서실 밖으로 나와 하는 잡담이었다.
유시민은 아주 끈기와 지구력이 있음을 독서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수학이 부족한 유시민이 수학책을
아예 통체로 외워버렸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유시민은 머리도 좋지만 꾸준히 책상에 앉아 집중하는 능력과
어떤 문제든 종합적으로 인식하려 하고
새로운 다른 관점으로 보려하는 노력이
오늘의 그의 모습을 만들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독서실이 지루하면 다른 독서실로 옮겨
공부하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라 얘기할 수 있다.
우리는 학원이나 과외는 꿈도 꾸지 않았다.
집안 형편도 형편이지만
스스로 한다는 자부심도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학원에서의 수강이나 과외에 의존하지 않고
책상 앞에 느긋하게 앉아 지둔하지만 죽어라고 공부하면
어려운 문제도 해결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독서실파’였었다.
그러나 1,2학년 때는 공부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미술반 활동을 같이 하여 미술실기대회에 같이 나간 기억도 나고,
결국 나는 미술이 전공이 되었지만.......
유시민은 글 쓰는데 소질이 있었다.
남 몰래 쓴 소설을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낙방한 일도 있었다.
고등학생이 신춘문예에 작품을 보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런 시도를 재미와 놀이로 생각한 것이
고교생활에 활력을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도 경북미술전에 처음으로 그린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은 했다.
이런 식으로 서로 비밀을 만들어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생물교과 방학숙제 중에 곤충채집이 있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있지만 그때는 그것이 숙제 중 하나였다.
우리는 곤충채집을 핑계로 대구 부근 가산산성으로
잠자리채를 들고 놀러갔었다.
산 중에서 길을 찾지 못해 모두가 갈팡질팡하였고,
겨우 길을 찾아 산 정상에 올랐을 때는
천둥과 번개와 함께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졌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방향은 보였으나 비를 피할 길은 없었다.
너무나 심한 비와 낙뢰로 두려움 속에서 산을 내려왔는데
모두 잠자리채는 어딘가 버린 채 몸만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시민이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가지고 내려왔었다.
산을 내려오니 거짓말 같이 비가 그쳤다.
시외버스에 긴 잠자리채를 가지고 탈 수 없어서 결국 버렸지만......
대학진학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 화가가 되겠다는 나의 뜻을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격려해준 사람은 유시민 이였다.
신장식은
'예술세계 밖의 문외한'들과
수없이 많은 '소통'을 했는데,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의미를 가졌던 '소통'은
1977년 봄 대구 시내 어느 독서실 복도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미술대학 진학에 대한 집안의 반대였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미대를 포기할 경우
그가 택할 곳은 경북대학교 상과대학이 유력했다.
신장식은 친구들의 강력한 지원과 격려를 등에 업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결국 미대에 진학했다.
그때 신장식이 화가로 성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뜻을 세우기를 권했던 친구들 가운데
예술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결국 회계사, 변호사, 회사원, 대학교수, 프리랜서 평론가 따위의 직업을 가지게 된 친구들이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소통의 능력' 덕분이었다. ......
친구를 잘 만나는 것,
예술가의 인생에서도 이보다 큰 행운은 드물다!
유시민, 2001 신장식 개인전 서문에서
친구들의 격려로 나는 반대하는 아버님에게
아주 긴 편지로 설득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어느 날 시민이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우연찮게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고 끝난줄 알았더니
그는 집에 가서 국사교사이신 어른께 이 얘기를 하여,
동양철학에 정통하신 어른께서 내 사주를 알아오라 하셨다.
나의 사주를 보시고 오행을 따지신 후 화가가 되려는 나에게
素山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셨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後素繪事’ 에서
흴 素자를 따고 뫼 山을 붙여 素山이라 한 것이다.
지금도 이 아호를 사용하고 있다.
요즘 내 그림의 주제는 ‘금강산’인데
개인전 때마다 봄 여름 가을의 금강산을 그린 작품 보다
눈이 온 겨울금강산을 그린 작품을 사람들이 더 좋아하고
소장하는 것은 소산이라는 아호가
나의 특성을 잘 나타낸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시민의 정치활동과 국회활동 중에
축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본인이 좋아하는 운동이다.
고교 때는 복도에서 볼펜축구에 열광하더니만!
볼펜축구란 수업시간 사이의 짧은 휴식시간에
복도에서 볼펜을 가지고 하는 축구를 말한다.
콩나물교실에서 공부하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짧은 시간 내에 풀어주는 데는 그만인 운동이다.
요즘 나는 그의 글 중에서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이 경쟁력입니다.
대한민국 개개인의
인지적,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능력이 커지고
국민들이 서로 믿고 협력하면서 살아갈수록
국가경쟁력은 그만큼 더 높아집니다.”
를 읽으면서 볼펜축구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우리나라가 인지적 능력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여서
그런지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능력이 중요하다는
그의 너무나 당연한 말에 큰 감동을 느낀다.
내가 경험한 유시민 의원은 소탈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잔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에게 투자하는
지식문화강국으로 만들어 나가자는 그의 말은
어릴 때부터 건강하게 성장한 그의 성품에서 나온다고 생각된다.
정치인 유시민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움이고 희망이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세련된 정치 문화를 그리워한다.
그걸 이루고자 하는 길 위에
희망을 노래하는 유시민과 함께 걷고 싶다.
신장식(화가,국민대 예술대 교수)
1989년 개인전때 우리가족과 함께
[출처] 내가 아는 유시민의 고교시절 / 신장식|작성자 금강방방
[출처] 박봉팔닷컴 - http://www.parkbongpal.com/bbs/board.php?bo_table=B01&wr_id=1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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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팔님께서 봉팔러들한테
펌질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는데
그냥 펌질합니다.
2007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선언할 당시
친구인 신장식 화백이 거액( 2천만원이라 기억 됨 )을
정치헌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이런... 이렇게 고마울데가 있나......!!!-
이러면서 그 분의 작품이 올라왔기에
그 때 저장해 놓은 것이 있어 올려봅니다.
그림 감상하시고 펌질을 용서하여 주사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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